어릴 적에 남아있는 기억이 많지 않은 편인데, 그 중에 특이하게 남아있는 기억이 하나 있다. 그 때는 엄마, 아빠, 나 이렇게 셋이서 엄마와 언니동생 하는 어느 이모가 운영하는 여관의 꼭대기 층에 살았던 시절이다. (여관이나 모텔은 꼭대시층에 시트나 베개, 각종 소모품을 보관하고자 별도로 두는 방이 있게 마련이다.)
특이한 기억'은, 그 이모네 카운터에서 우리 가족과 이모, 이모부가 같이 있었던 걸로 시작한다. 당시에 내는 짜장면을 맛있게 먹었는데, 먹다가....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꽤 오랫동안 왜 내가 울음을 쏟아냈는지 나조차도 의문이었다.
밥상머리에서 울면 안된다고 그랬는데. 그래서 인생에 뜻하지 않던 불행이 와르르르 쏟아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불행이 이제는 행복으로 변신하여 지금의 나는 남편과 아들을 둔 엄마로 지내고 있다. 그렇게 육아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다 문득 그 때의 짜장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단서를 마주치게 되었는데.
엄마께서는 어렸을 적 내게 '우리집은 중산층이 아니라 하층이야, 알았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꼬꼬마 입장에서 뭐가 중산층이고 뭐가 하층인지 알게 뭐람. 그냥 엄마가 그렇다고 하니까 '응!'하고 마는 거지. 학생때는 빈자/부자의 개념도 희박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세간에 화재가 되는 부자 이야기에 잠시 솔깃했지 부유한 삶에 그렇데까지 관심을 두고 살진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 해 보니 우리집이 확실히 부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가끔 본인의 얘기를 하셨다. 기성복이 없어 모두가 맞춤옷늘 지어입던 시절에, 느즈막이 바느질을 배웠으나 열정을 다해 기술을 익히고 압도적인 성장을 바탕으로 이대에서 명동에 진출한 김 여사님 이야기. 통금이 있던 시절에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엄마 밥달라도 한 이야기. 직원들을 있는데로 부려먹던 공장장에 대항하여 친한 동료들이랑 단합하여 공장 땡땡이치고 여행 간 이야기 등. 내게 있어 대한민국 현대사는 우리 엄마의 삶이다.
다시 짜장면 먹다 울었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이제서야 왜 내가 그랬는지 알 것같다. 그 힌트는 우리 아들램이 주었다.
아이가 만 3세가 넘어가니 그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아이와 다양한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내가 울면 아이도 별안간 따라운다는 것이다. 유툽에서 마음아픈 사연을 듣는다든가 감동적인 사연을 들으면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는데. 이 모습을 보고있던 아들램이 엄마를 안아주며 같이 운다. 어느 순간 우리는 부둥켜 안고 같이 운다. 찔찔이 모자(母子)같으니!
그런 날도 있지만 대개의 날들은 웃고 떠들며 같이 논다. 그럴땐 아들보다도 나이차이가 엄청 나는 귀여운 동생이 생긴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날이 갈 수록 아이가 예뻐보인다. 엊그제는 수업을 마치고 오는 길에 어느 다른 엄마가 본인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걷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때는 아들램보다 우리 엄마가 번뜩 떠오르더라.
우리 엄마도 날 키울 때 저렇게 이뻐보이던 시절이 있었겠지. 첫 아이를 아픔으로 보내고 가까스로 얻은 딸이라 너무너무 귀하고 이뻤겠지. 친구가 내 어릴적 앨범을 보더니 '와 나는 어릴 때 옷이 비슷비슷한데, OO이는 옷이 여럿이였구나!' 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 엄마가 맞춤옷 시대에 옷 만들던 까라와 센스가 있어서 그랬겠거려니 했다.
멍청아, 그거 다 너 좋아해서 그런거야. 늬 엄마가 너한테 헛똑똑이라고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지.
짐작하건데, 내가 짜장면을 먹다가 울음을 터뜨린 건 아마도 그 때 엄마가 몰래 눈물짓던 모습을 봐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형제는 많고 형편은 어려운 집에 노총각 남편 하나 믿고 시집와서 본인의 모든 열과 성을 쏟아 집안을 일으켰던 어머니. 오죽이나 힘드셨으면 기도 드리러 간 불당에서 목놓아 울었던 어머니. 울다가 불상을 바라보는데 눈을 감고 있어야 할 부처님이 게슴츠레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어서, 헛것을 보나 눈을 비비셨다고. 눈을 비비고도 부처님이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던데, 그 덕이었는지 이후로 집안 살림이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그렇게 내가 보아온 어머니는 잠을 줄여가면서 집안을 이끌고, 고추 당추 맵다해도 그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를 버텨내고, 다소 체력이 안 좋은 아빠를 지극히 보살피던 사람이었다. 어릴 때는 그게 당연한 건줄 알았는데, 막상 내가 결혼하여 내 주변을 둘러보니 당연한 게 당연한 게 아니더라. 내가 만난 시댁은 파프리카만도 안맵고 남편도 건강하니 이 얼마나 큰 행운이리.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집이 썩 부자가 아닌 덕분에 나는 공부할 때 학원보다는 나 스스로에 의지하여 공부하는 경험을 더 많이 쌓았다. 이름 대면 알아볼 대학 들어갔으면 성공한 거지 뭐. 부모님께 손벌려 해외여행을 가지 않으려 공모전에 도전했다가 주최측에서 제공한 싱가폴 방문기회도 누려보았다. 2등 수상은 덤으로 받았고. 늦둥이 딸래미가 부모님이 다른집 부모님보다 빨리 돌아가버리실까 걱정되서 글자 그대로 '날 먹여 살리려' 시작해본 요리 덕분에 현재도 우리 가족은 배달이나 외식이 거의 없이 집밥을 먹는다.
이쯤되면 키워놓은 딸이 어디 가서 부끄럽게 크지는 않은 것 같은데? 지금도 좋은 남편 만나 사이좋게 잘 지내, 귀여운 아들도 즐겁게 잘 키워, 집안도 어느 정도 잘 관리해. 훌륭하지!
이렇게 대단한 나도 치사랑을 할 자신은 없다. 그래도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엄마처럼 일, 가정 모두 마음을 다해 돌보려고 노력중이다. 가끔 소리를 빽 지르긴 하지만 아들램하고 잘 지내고는 있는 것같은데. 오늘같은 날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아들래미가 아니라 엄마한테 하고프다.
"엄미 사랑해요!!!!!!! 날 키워줘서 너무 고마워요!!!!!!!!!!!!"
야 이 바보야, 사랑한다면서 왜 또 눈물은 짜는 건데. 헛똑똑이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