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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은비 Sep 04. 2023

양쪽 측면

보미오면



° 양쪽 측면


초등학교 운동회날.

헬륨이 들어있는 풍선들과 장난감을 파는 장수들이 학교 앞에 나온다. 솜사탕이나 아이스크림, 음료를 파는 곳도 있어서 친구들의 손에는 맛있는 식들 들려있다. 그런 친구들의 얼굴에는 천진난만한 웃음이 가득하다. 

그리고 학교 운동장에는 부모님들이 돗자리를 펴고 한 자리씩 맡은 채 자식들과 오손도손 앉아있다. 보미는 오손도손하고 과일들과 간식들이 많은 돗자리가 그저 부럽기만 했다. 친구들이 이 장난감 저 장난감을 사서 들고 다니는 것도 솜사탕이나 각종 간식들을 먹는 것도 부러웠다.



그 속에서 보미는 항상 버튼만 눌리면 아이스크림이 툭 튀어나가는 아이스크림 장난감바닥에 끌고 다니면 팔락거리는 나비 장난감이 갖고 싶었다. 그러나 돈은 없었고 장난감을 사 줄 사람 없었다. 하지만 보육원 아이들은 모두 같았기 때문에 쓰린 속을 달랠 수 있었다. '혼자는 아니라 다행이야' 아마 혼자 하는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많은 가족들 사이에는 커다란 대나무 돗자리가 펼쳐졌고, 하얀 일회용 도시락 용기에는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들어진 김밥이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항상 변하지 않운동회 풍경이다.



보미 운동회에서  기다리는 종목 바로 달리기. 놀이터가 없던 시골에서 뛰기만 했기 때문인지 달리기가 빨랐다. 달리기를 시작하는 출발 레인에서부터 심장은 요동을 친다. 보미는 언제 출발하는 총성이 들릴까 긴장하며 영점 일초라도 일찍 출발하려는 욕심이 가득하다. 총성이 들리 조금 늦었더라도  다른 아이들을 제치고 레인 안쪽으로 바짝 들어온다. 이를 꽉 문채 달리면 떨리는 볼살이 으로 보였다. 그 볼살을 보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몇 초 사이에 많은 생각을 한다.

운동장에는 딸,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일등 하라는 응원이 가득하다. 그 열띤 응원들을 뒤로한 채 보미는 항상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너네는 일등 안 해도 엄마, 아빠 다 있잖아? 그러니 내가 일등이라도 할게'

언제부터인지 달리기를 할 때면 보미는 항상 이 생각을 했다. 그저 자식들을 응원하는 것뿐인데, 그 응원들 속에 보미를 한 응원은 없으니 시기했나 보다. 다른 자녀들에게 일등의 기쁨까지 내주고 싶지 않서 항상 달리기는 일등을 했다.


백 미터 달리기, 삼백 미터 달리기.

운동회 때면 항상 손목에 일등 도장이 찍혔고, 모든 달리기 일등은 놓치지 않았다. 아, 오 학년쯤 장애물 달리기에서 찾아야 할 선생님이 안 계셔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꼴등을 한 것만 빼면 말이다.

어렸을 땐 운동회가 그냥 재미있었고, 조금 크니까 보육원 아이들이 앉아있는 돗자리에 앉지 않았다. 전교생이 적어서 누가 보육원 아이들인지 다 알았지만, 부모님들도 함께인 운동회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나 보다. 사실, 동네에서는 모르는 부모님들도 없었는데 말이다.




학교 친구들 생일 때는 끼리끼리 집에 모여 생일파티를 했다. 부모님이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한 생일상을 차려주시고, 축하 노래를 하고 선물을 전하는 전형적이었지만 고아원 아이들은 못하는 그런 파티말이다.

어쩌다 보미가 초대를 받기라도 하면, 고아원 사무실에서 학용품을 받아오거나 용돈으로 선물을 샀다. 보미는 생일파티를 못했지만, 초대한 친구가 고마워서 멋진 선물을 해주었다. 보육원에 살지만, 일반 가정집 아이들 못지않음을 티 내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보육원이 싫었으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유는 초등학교 시절에 외환위기 IMF가 터졌기 때문이다. 많은 집들이 망하고 망했을 시절인데 보미는 실감하지는 못했다. 부유하지는 않아도 학교 준비물 정도는 보육원에서 받아쓸 수 있었기 때이다. 학교에 매번 준비물이 없어서 뒤로 나가던 친구들을 보며 보육원이라도 살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한편에 후원자님들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단체 후원 이외에도 아이 한 명당 두세 명 후원자님이 계다.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실감은 못했지만 말이다.

이외에도 일반 대학생부터 대기업에서 매달 직접 와서 봉사를 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촌동네 꼬마들은 한강 유람선 타보고, 서울구경도 해 볼 수 있었다. 많은 봉사가 있었기에 일반적으로 할 수없던 일들을 누릴 수 있었다.


큼지막한 일들 말고도 소소하게 보육원에서 요리를 해 먹기도 했고, 여러 유원지들도 가는 등 많은 후원을 받았다. 또 인근 놀이공원에 데려가서 재미있게 놀기도 했다. 특히 에*랜드에서는 매 년 후원을 해주셔서  년 가서 놀 수 있었는데, 촌동네 꼬마가 큰 놀이동산 길은 물론이고, 어떤 것이 바뀌었는지도 알 정도였다.

놀이공원에서 키가 작아 못 타던 바이킹을 언니들 틈에 끼여서 몰래 입장던 것 생각난다. 언니들은 무섭다고 꺄악 꺄악하는데, 그 사이에서 재미있다고 즐거워하던 겁도 없는 보미다.


인근에 대학교들 있어서 대학생들 많이 왔었다. 물론, 봉사점수를 채우기 위해서였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중에 보미와 우진이를 예뻐하던 언니가 있었다. 그냥 찾아와서 맛난 것도 사주고, 스티커 사진을 찍거나 하는 소소한 일상을 만들어주었다. 사실 보미는 그 언니가 친모를 닮아서 좋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렴풋한 기억으로 큰 눈이 친모와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상상이 안되던 엄마와 함께하는 일상 같아서  좋았다.


많은 후원자님들을 보며 어릴 때야 멋모르고 있었지만 커 가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봉사를 할 수 있을까?

무엇을 바라고 우리에게 후원을 해줄까?

왜 우리를 좋아해 줄까?

궁금증부터 시작해서  '나도 베풀며 살아야지!', '나누며 살아야지!' 생각했다.


보육원에서는 일 년에 한 번, '후원자의 밤' 행사를 했다. 우리가 열심히 준비해서 율동하고 노래하 연주하는 등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받은 거에 비해 많이 부족했지만 열심히 다. 우리가 할 답례는 이런 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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