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보미의 별명은 개구리와 닮은 모든 것이었다. 눈이 커서인지 개구리 만화가 나오기라도 하면 별명이 붙었다. 큰 눈에 큰 콧구멍과 커다란 입은 누가 봐도 개구리였다.
별명의 힘인지 보미는 물을 참 좋아했다.
보육원 안에는 일반 대중목욕탕과 같은 탕과 샤워기 열 개 정도의 작은 목욕시설이 있다. 동절기, 하절기 기간 차이는 있지만 한 주씩 남자, 여자 번갈아가며 목욕탕을 썼다.
같이 들어가는 몇 명의 보육사와 큰 언니들이어린아이들의 때를 밀어주었고 초등 고학년부터 중, 고등학생 아이들은 스스로 때를 밀고 청소까지 하고 나갔다.
목욕할 때 단체로 옷을 벗으면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다. 이말 저말 다 나오고 누구 키가 얼마나 컸는지 누구 가슴이 얼마나 컸는지 별소리를 다한다.
"야, 너 가슴이 왜케 컸나. 이야~ 언니야 다 됐네"
그럼 아이들마다 달라서 부끄러워하는 친구도 있고, 뿌듯해하는 친구도 있다.
목욕탕에 입장하면 간단히 비누 칠을 해주고 탕으로 들어간다. 얼마나 뜨거운지 수증기 때문에 목욕탕이 뿌옇다. 잠깐만 담갔다가 빼도 담근 부분이 벌게져서 어느 부분까지 넣었는지 알 수 있었다.
탕 속에 모두 들어와 있으면 끼리끼리 이야기꽃이 피어 시끌벅적하다. 누구는 남자 친구가 생겼고, 누구는 헤어졌고, 누구는 생리 기간이라 못 왔다느니 서로의 근황들을 알 수 있었다.
목욕탕에 있으면 빠지지 않는 잠수 대결.
보미는 항상 승부욕에 불타올랐다. 폐활량이 좋은 건지, 지기 싫어서 참다가 길어진 건지 항상 일등은 보미 몫이었다.
시작하기 전 공기를 한껏 마시고 물속으로 입수한다.그리고 참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으로 참다가 가지고 있는 숨을 조금씩 뱉어낸다. 숨을 참는 것도 뱉는 것도 아주 느린 속도로 하다 보면 물속에 남아있는 아이들은 몇 안 된다.
물속에 있어도 누가 탈락했는지 들리기 때문에 몇 명 남았는지 계산이 되는데 지기 싫어서 버텼다. 사실 숨이 차서 나가고 싶은데도 무슨 대단한 거라고 버텼는지 모르겠다.
보미는 수영을 배운 적도 없었는데 물 위에 잘 떠있었다. 발로 물장구를 치고 손으로 물을 갈라 헤엄치면 못 갈 곳이 없었다.
물이 있는 냇가, 강, 계곡, 바다를 가면 웬만한 장난꾸러기 저리 가라였다. 물안경을 끼고 물속에 들어가 아이들 다리를 잡아당기고 튜브도 뒤집었다. 보미가 뒤쪽으로 가기라도 하면 빠뜨릴까 봐도망가기 바쁜 아이들이었다.전생에 인어공주라고 해도 믿을 만큼 물속에서 자유로웠다.
개헤엄을 쳐도 잘 떠있었기 때문인지 바다를 가면 더 재미있었다. 조용한 물속에서 발이 안 닿고 자유로이 움직이는 것에매력을 느꼈다. 몸에 모든 힘을 빼고 둥둥 떠서 하늘을 보는 것도 좋았고물안경을 쓰고 보는 바닷속도 예뻤다. 알록달록한 색과 넘실넘실 흔들리는 바닷속 식물들은 영롱해서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모양은 다르지만 떼로 몰려다니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도 신비로웠고 힘으로 막을 수없는 파도도 매력 있었다.
해파리에 쏘여 따끔하게 아프고 흉이 졌지만 바다가 좋은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바다에 자주 갈 수는 없었지만 보육원 아이들과 가끔 실내수영장으로 가서 물놀이하고놀았다. 용돈통장에서 빼야 해서 자주는아니었지만, 숨을 길게 참던 보미에게는 재미있는 레이스였다. 엉망인 헤엄 솜씨로 서로 경주도 하고 내기도 했다. 그렇게 나오면 후들거리는 다리가 열심히 놀았다는 티를 내주었다.
보육원에 사는 우리는 국민학교 일 학년 때부터 기초생활수급자였다. 그래서 학교에서 나오는 흰 우유를 무료로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보육원에서도 주는데 학교에서까지 먹고 싶지 않았다.
마침 학교 앞 문방구에서 우유 하나를 백 원어치 간식으로 바꾸어준다는 소리를 들었다. 학교 바로 앞 문방구에서만 주인 할머니가 몰래 바꿔주셨다.
그 시절 흰 우유가 이백 원이었나? 이백오십 원이었나? 금액적으로는 손해이긴 했지만 간식을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매일같이 바꿔 먹었다.
"우유 팔아먹었나?"
"뭘로 팔아먹었나?"
어감이 나쁜 짓 같지만 바꿔 먹었다는 뜻으로 통했다. 선생님은 우유를 바꿔 먹지 말라고 했었지만 돈이 없던 우리는 그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화툿장 크기인 납작 엿 두 개가 백 원이었는데, 가격에 비해 오래 맛을 볼 수 있어서 보미는 엿을 자주 먹었다. 쪼개고 쪼개 조금씩 천천히 먹으면 오랜 시간 달달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비싼 간식이 먹고 싶을 땐 아이들이 모여서 사 먹기도 했는데 여러 명의 배를 채울 수는 없었다. 며칠 모아서 먹어도 되지만 하루라도 군것질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문방구에서 안 받아주면서 사라진 우리들의 추억이다.
우리가 다닌 국민학교는 학년별로 두 개의 반만 있던 작은 학교였다.
보육원 친구 형두와 일, 이학년 때 같은 반이어서 항상 같이 다녔는데, 키가 한 뼘은 작아 남동생인 줄 아는 사람도 많았다.
학교가 끝나면 샛길로 공부방 가는 길이 있었다. 그 길에는 뽕(오디) 나무가 있었는데 따려면 학교 뒤편창고 위로 올라가야 했다. 건물 옆으로 쌓인 나무 판을 밟고 구불구불한 철판이 여러 겹 덧대어진 지붕으로 올라갔다. 튼튼하진 않았지만 가벼운 보미는 살금살금 걸어서 다닐 수 있었다. 윗도리를 뒤집어서 뽕을 담기도 하고 밑으로 던지기도 했다.
"땡두, 내가 따서 떤지면 거서 받아야 된대이~?"
그러면 형두가 상자를 구해와 보미가 던지는 열매를 받았다. 각자 한 움큼씩 뽕을 따서 먹으며 공부방으로 갔는데 바로 딴 열매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손이며 옷이며 온몸에 검붉은 오디 열매 색이 칠해져 있었다.
보미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고, 매번 일등으로 문제집을 끝내고 나왔는데 어느 날은 수학 문제를 풀다가 안 풀린 적이 있다.
안 풀리니까 짜증이 났고 짜증이 나니하기 싫었다. 엄청난 짜증을 냈음에도 가타부타 말도 없는 선생님도 싫어서 펑펑 울었다. 너무 하기는 싫은데 문제는 안 풀리고 아주 펑펑 울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 펑펑 울었기 때문인지 잠들기는 쉬웠다.
얼마나 잤을까? 결국 밖은 어두워졌지만 자고 일어나니 화나고 짜증 나던 마음이 풀렸고, 해야 하는 문제집도 금방 풀 수 있었다. 도대체 스스로 못 이기던 짜증은 어디에서 나온 성질이었을까? 보미의 답도 없는 성화에도 큰소리 한번 안 내신 선생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은 할머니 한 분이 리어카를 끌고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이런 상황에는 도와주는 거라고 배워서 형두와 같이 말했다.
"할머니~ 저희가 도와드릴게여~"
책으로 배운 것을 실행하는 건 부끄러웠지만 형두와 같이 있어서 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보미보다 덩치도 작고 조그만 형두가 동생인 줄 아셨는지 리어카에 태우고 보미는 리어카를 끌게 하셨다. 물론 할머니가 뒤를 잡아주어 확 내려가지는 않았지만 땡두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고소해하는데 얼마나 약 올랐는지 모른다.
할머니와 헤어지자마자 얄미운 형두를 세게 꼬집었고, 아파하는 것을 보니 속이 시원했다. 같은 나이인데도 작은 형두라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초등학교 끝나고 혼자 집으로 가던 길.
연못을 둘러싼 보도블록 바닥에 과자가 떨어져 있었다.그 앞에 서서 바닥에 떨어진 과자를 힐끔힐끔 보며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너무 먹고 싶은데... 누가 보면 어떡하지?'
'주워서 버리는 척할까?'
'정말로 먹고 싶은 과잔데...'
'주위에 누가 있을까?'
티가 날까 봐 두리번거리지는 못하고 결국 주워서 걸어갔다. 그리고 쓰레기통으로 버리는 척을 하며, 소매 안쪽에 숨겨 넣었다. 그리고 한참 걷다가 숨긴 과자를 입으로 옮겨 넣었다.
바닥에 과자를 주워 먹었을 뿐인데 그런 스스로가 가여워서 생각했다.
'커서는 꼭 돈을 주고 사 먹을 거야!'
별로 특별한 일도 없었는데 이날을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아마 스스로가 자존심이 상해서 일 것이다. 더러운 것도 알고 버려야 된다는 것도 알지만 먹고 싶었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게 속상해서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