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나의 추억의 장소
지리산 산자락 아래 아늑한 작은 도시. 그곳은 내 어린 시절의 추억 보물창고다. 내가 사랑하던 외갓집이 있던 구레 산동. 지금은 개발이 되어 사라져 버린 연초록색 기와집 외갓집을 떠올려본다. 다시 가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와 동생들은 방학 때만 되면 외갓집을 향했다. 거의 온 방학을 그곳에서 보내다시피 하다가 개학날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인지 나의 방학 추억은 온통 외갓집에서 만들어졌다. 보통 한 달 동안 외갓집에 머물렀다.
사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남동생이 태어남과 동시에 외가에 보내져서 지냈다고 한다. 내 기억 속엔 없지만 셋째 이모가 나를 업어서 딸처럼 키워주셨다고 했다. 큰 이모는 일찍 결혼을 해서 서울에 살고 계셨지만 셋째와 막내 이모는 외가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셨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이모들이 엄마처럼 따스하고 좋다. 막내이모는 결혼해서 서울로 가기 전까지 외가에 살았으니, 꼬꼬마 시절 이모들은 엄마를 대신했다.
직행 버스를 타고 외가에 가면 커다란 느티나무 곁의 산동면 시내의 큰 길가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가게와 관공서가 줄줄이 늘어져있는 번잡한 시내 뒤쪽 동네에 외갓집이 있었다. 버스정류장 뒤로 연결된 작은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뾰족한 산동교회가 보였고, 그 옆으로는 산동중학교가 있었다. 외갓집이 바로 그 아래에 있었다.
한 번은 겨울방학 때 막내이모가 우리를 데리러 오신 적이 있었다. 그때는 눈이 많이 내려서 버스대신 구레까지 기차로 가서 버스를 갈아타고 산동으로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구레역에 내렸을 때는 폭설로 인해 버스가 운행을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모의 손을 붙잡고 외갓집까지 눈길을 걸어서 갔던 기억이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날 우리가 걸었던 그 하얀 눈길을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다. 심지어 나는 가끔 꿈속에서 눈보라를 헤치며 그 길을 걷기도 한다. 멀고도 먼 길을 그저 이모 손만 붙잡고 다리를 끌며 걸어갔던 그 겨울을, 외갓집에 도착하여 보드라운 비단 이불이 깔린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들어가 몸을 녹이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골목길에서 외갓집이 보이면 달음박질하여 헐떡이며 작은 뒷문을 지나 초록색 대문을 향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깔끔한 화장실이 두 칸 나란히 있었고, 하얀 디딤돌이 중앙에 길을 내어 여러 개의 유리문으로 만들어진 외갓집 현관 앞 기다란 토방까지 연결했다.
하얀 길 양편으로는 작은 꽃밭이 가꾸어져 있었고, 오른쪽 꽃밭 끝으로는 수돗가와 장독대가 있었다. 토방 아래는 단단한 흙마당이 우리가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내주었다.
생각해 보니 그 시절 외갓집이 꽤나 세련되고 멋스러우며 신경 써서 잘 지은 집이란 걸 알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깔끔하고 정갈하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보살핌 아래 우리는 많이 놀고, 먹고, 웃으며, 배웠다.
마당에서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면 신발을 벗어두는 기다란 문지방에서 다리를 올려 커다랗고 넓은 마루로 올랐다. 명절에는 외가의 큰 마루에 교자상 여러 개를 펼쳐 음식을 가득 차려서 온 식구가 삥 둘러앉아 만찬은 나누었다. 외할머니의 음식솜씨는 아무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소문난 요리가셨다. 지금도 엄마는 외할머니를 못 따라가신다고 안타까워하는데, 나 또한 엄마의 솜씨를 못 따라가니 점점 세대를 따라 그 음식솜씨가 실력을 잃어가는 것만 같다.
큰 마루에서 중앙에 한지 창호문살 여닫이문을 열면 할머니의 안방이었다. 마루 오른쪽에는 줄곧 집 근처 산동중학교 선생님이 세를 들어 살곤 하셨다. 마루하고 연결된 방이지만 커다란 방 옆으로 부엌이 따린 곳이었다. 외할머니는 우리에게 그 문을 열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곤 하셨다.
현관은 여러 유리문이 이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유리문 위를 길게 덮고 있는 두터운 커튼을 아침이면 일어나 걷었고, 해가 저물면 마루가 있는 거실의 기다란 커튼을 치는 일로 하루의 일과를 마쳤다.
왼쪽으로 할아버지 방이 있었다. 매끌매끌한 할아버지 방은 언제나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우리는 외할아버지 방을 어지럽히지 않고 놀려고 꽤나 애를 썼던 거 같다. 왼쪽 할아버지 방에는 부엌으로 연결된 문이 있었다.
외할머니의 안방에서 부엌으로 나가는 문이 있었는데, 문을 열면 마루가 있었다. 그곳은 할머니의 보물창고로 할머니의 소중한 오든 것이 그곳에 있었다. 선반마다 차곡차곡 무언가가 가득했다. 뒷마루에서 계단을 내려서면 할머니의 부엌이었다. 널찍한 할머니의 부엌에서 뭐든 맛있는 요리가 완성되었다. 부엌 뒷문을 열고 나가면 뒷마당이 있었다. 가끔 우리는 뒷마당에서 소꿉놀이를 하거나 배드민턴을 치기도 하고, 달음박질을 하며 뛰어놀았다.
안방에는 다락이 있었는데 다락은 부엌 천장으로 연결되었던 거 같다. 할머니의 귀중품들이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우리가 도착하던 날에는 어김없이 빠뜨리지 않고 당면이 들어간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준비해 주셨다. 기다란 전기프라이팬에 맛있게 양념된 두루치기는 얼마나 꿀맛이었는지 지금도 생생하다. 다시 한번 먹어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나 그리운 내 마음의 맛이다.
늘 쪽진 머리를 하시고 틈만 나면 한복을 손수 지으시던 할머니의 솜씨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우리를 위해서도 한복을 때마다 지어주셔서 새로운 색동한복을 입곤 했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이 요청한 한복도 직접 지어드리며 소일거리도 하고 계셨다. 할머니의 한복 짓는 솜씨는 소문이 나 있었다.
친정 엄마도 한복을 지어서 우리를 입혀주시곤 하셨는데, 그래서일까? 나는 한복을 짓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다. 내가 미싱을 다루고 바느질을 잘했다면, 나도 우리 옷 한복 짓는 일을 전업으로 삼지 않았을까? 지금 와서 조금 후회되는 부분이다.
외할머니의 안방에는 골무와 실, 바늘, 옷감이 늘 자리를 차지했다. 가끔 우리는 할머니의 섬세한 손놀림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빳빳하게 지어진 한복을 보면 덩달아 마음이 기쁨으로 차올랐다. 얼마나 곱고 예쁘던지 그 비단 천과 옷맵시를 지금도 기억한다.
줄곧 우리는 마루에서 놀잇감을 찾아 시간을 보냈다. 우리 삼 남매가 돌아가면서 노래자랑이나 장기자랑을 하면서 발표 놀이를 즐겨했다. 방학숙제도 조금 했다가 안방에 있는 작은 모니터의 텔레비전을 시간에 맞춰 보기도 하고,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외갓집에서 방학을 착실하게 잘 보냈다.
개학을 앞두고 이모가 데려다주거나, 아빠가 우리를 데리러 올 때면 서운한 마음에 눈물을 짓곤 했다. 마치 정든 고향집을 떠나는 것처럼. 외할머니의 눈가에도 촉촉한 눈물이 흐르곤 하셨다. 셋이 다 같이 머물 때도 있었고, 가끔은 나 혼자나, 여동생과 방학을 보내기도 했다. 꽤 귀찮기도 하셨을 텐데 늘 사랑으로 맞아주시고 기다려주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마음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고등학교 때 외할아버지께서 먼저 돌아가시고, 다음 해에 외할머니께서 따라가셨다. 젊어서 꽤나 음주가무를 좋아하시고, 거문고를 즐기시며 외할머니의 속을 꽤나 썩게 하셨던 외할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던 외할머니는 오래 버티지 못하시고 뭐가 그리 좋으신지 빨리도 따라가셔 버렸다.
막내이모와 같이 갔던 이모 친구 집도,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팔던 가게도, 주일이면 가서 예배드리던 산동교회도, 외갓집 앞으로 넓게 뚫린 커다란 도로와 시내의 풍경들이 내 기억 속엔 남아 있다.
날이 풀리면 비록 지금은 사라져 없어진 옛날 우리 외갓집이 있던 그곳에 꼭 가봐야겠다. 그곳에 가면 잔잔하고 고운 미소로 반기시던 장순동 외할머니와 키가 크시고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멋쟁이 김학규 외할아버지를 다시 만나 뵙고 싶다. 귓가에 나지막하게 우리를 부르시던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 생애에 외가가 있어 감사했다. 그곳이 내 집인 마냥 들락거리며 살다시피 했던 게 이리도 고마운 추억이 될 줄이야. 세월이 흘러 흐릿해진 기억 속에 그나마 남아있는 소중한 추억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