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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상 May 06. 2024

질투! 나를 쓰러트렸던 강펀치

(걷다가 힘들어 잠시 쉬는 중입니다. 2화-3)

지성이 넘치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 지성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시대는 그러한 현상에 딱 맞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감정 노동"이라는 단어였다. 


우리나라의 전체 임금 근로자의 35%가 "감정 노동자"로 불린다. 

몸 힘든 것은 참겠는데 마음이 힘들어서 그만두려 한다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상한 감정의 치유"가 절실함을 직감한다. 하프 타임을 가지며 쉬는 나에게 쉼 없이 파고들었던 그 소모적 감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직업적으로 나는 감정의 노동자로 분류되지 않지만 일상의 삶에서 극심한 감정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노동의 결국은 누구에게나 피로와 탈진이다.  


혹자는 말한다. 

내 인생 남의 눈치 보지 말아라! 

남의 평가에 귀 기울이지 말아라! 

너와 맞지 않는 사람과는 신속하게 손절해라! 그렇다 그 말은 전적으로 옳다. 그렇지만 살아보면 또 살아보니 그것도 그렇게 되기까지의 긴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을 고백한다. 

나와의 씨름에 지쳐서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아서 내려놓음을 선택할 그때까지 아주 긴 시간이 필요했다. 

자기 계발이나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내 살에 난 생채기 앞에 자기 보호색을 띠는 그것이 나에게는 포기였다.


그 강력한 펀치는 질투라는 감정이었다. 긴 시간 우리는 이 감정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그 감정은 끝 모를 상상과 추측으로 우리를 벼랑으로 밀어붙인다. 이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적 감정인 질투 앞에 스올 곧 지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아가서 8장

6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성경의 아가서는 사랑과 질투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고 질투는 지옥과 같이 잔인하다. 사랑이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통제가 되듯이 질투의 감정도 지옥과 같이 잔인함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한번 시작되면 불길같이 타올라 마치 여호와의 불과 같다는 그 말에 경험적으로 동의를 표하게 된다. 


창세기 4: 1 - 7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태초의 살인이 시작된 지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교 그리고 질투와 시기와 분노의 감정이 엉켜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정의 욕구가 좌절된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죽이는 그 잔인함은 질투의 감정과 닿아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가인의 피를 물려받은 후예들이기에 언제든지 경쟁과 비교 속에서 질투라는 잔인한 감정에 쌓여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우리가 가인의 후예답게 마음속에서 수 없이 많은 살인을 연습하는 동안에 온 기력을 소진하게 되는 것이다. 


사무엘상 18 :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무엘상 18 : 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을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사울은 이날부터 서서히 마음이 흔들리고 그리고 미쳐가고 죽어갔다. 결국 왕권은 많은 우여곡절을 남기며 다윗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처절한 공감을 일으키지만 그러나 선을 넘고 도를 넘고 결국 자신을 파괴했던 그 감정이 바로 질투였다. 


세상은 모든 비교의 대상으로 가득하지만 나의 경우엔 인정의 욕구에 대단히 민감하고 , 일에 대한 성취욕이 강했다. 그런 이유로 재능과 리더십이 뛰어난 사람과 함께 서게 되면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 사실이다. 스스로 경쟁을 부추기며 극한의 노력으로 신체를 몰아넣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도 더 목말라하며 인정의 욕구에 시달렸던 젊은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나도 모르게 그런 감정에서 자유로운 자신을 대면하게 되었다. 

아마도 경험이 쌓이면서 각양의 방면에서 나보다 나은 사람은 항상 있고 그들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내 주위를 맴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대적하는 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에게 좋은 모델이었고 그리고 자주 배움의 대상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돌아보면, 그 소진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그 노력에서부터 서서히 달라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문득 주어진 그런 자유가 경쟁에서 주는 기쁨보다 얼마나 삶을 풍성하게 했고 안심하게 했고 평화롭게 했는지 스스로 참 감사한 마음이 가득했었다. 


마2:1 - 3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질투심으로 두 살 아래 모든 남아를 살해했던 헤롯왕)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삶을 다루는 1984년에 제작된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나는 이 영화를  아주 감동적으로 보았다. 천재를 시기한 평범한 궁정음악가의 질투에서 시작된 광기에 찬 파멸의 서곡!

살리에리 증후군[ Salieri syndrome ]이라는 말까지 남긴 이야기의 줄거리를 대하면 우리 마음의 심연에 깊이 자리하는 불편한 감정! 질투가 얼마나 잔인한지를 알게 되는 듯하다.

(엄숙한 노력파 살리에리와 유쾌한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 두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비엔나 왕실의 궁정음악가 살리에리(F. 머레이 아브라함)는 새롭게 떠오르는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톰 헐스)의 소문을 듣고 그의 천재성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방탕하고 오만한 사치꾼 모차르트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그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시기하게 되고 자신에게 재능을 주시지 않은 신에게 분노하며 자유분방한 천재 모차르트를 파멸시킬 음모를 준비하게 된다.... 모차르트의 죽음 이후 죄책감을 느끼며 수차례 자살시도 끝에 정신병원에 수감된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그를 찾아온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빌어 자신의 음악가로서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내용이다.

"내가 원했던 건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소. 하나님은 내게 그 열망을 주셨지만 날 또한 벙어리로 만드셨소. 어째서?..... 왜 내 몸을 좀 먹는 그런 열망을 심으셨는지, 그러면서 왜 재능은 주시지 않으셨는지 말이오

"나는 보통 사람들의 대변자요.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대변 자지. 난 그 평범한 사람들 중 최고요! 그들의 수호자이기도 하고!"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여......"

"너의 죄를 사하노라."

"너의 죄를 사하노라."

이 서늘한 대사가 진행되는 동안 누가 감히 천재를 질투한 광기 어린 범인(人) 살리에리를 손가락질할 수 있을지!!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마음이 천재를 향한 부러움 보다 범인 (人)의 아픔에 깊은 공감을 느꼈다.


나는 그 이를 사랑하기는 어려웠지만 반대로 모차르트를 미워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 가벼운 몸짓과 경박한 삶을 보라 그리고 저 해맑고 천진한 웃음을 보라! 그런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천재적 재능을 가졌다. 그래서 나는 더 고통스러웠다. 그 감정에 이입되는 나 자신을 싫어하면서 나도 몰래 빨려 들어가는 그 인간의 속성을 어찌 제어할 수 있을까?




나는 청년회가 굉장히 활발했던 교회를 다녔다. 우리는 함께 삶을 고민하며 성장해 갔지만 동시에 비교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모두가 숨은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외모의 비교

학벌에 대한 비교

취업에 대한 

연애에 대한 

가족관계와 신앙에서 조차 비교하며 숨이 가쁘게 살았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성장을 경험했지만 돌아서서 남모르는 좌절을 훨씬 더 많이 경험했다.

그 사랑의 공동체조차도 젊고 성장하는 과정 속에 우리에게 가혹하리 만큼 쟁쟁한 질투의 소용돌이로 가득했다면 어딘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겉으로 인정하고 수긍하지만 속으로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질투의 욕구.

아주 작고 예민한 일에 얼마나 사람이 작아지고 못나게 되는지 경험한 사람만이 이 유치하고 치졸한 감정의 쓴 맛을 알 것이다. 



창세기 4: 6 - 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


불길과 같이 타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 감정을 다스리지 않으면 낯을 들지 못하는 일이 생겨난다.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고통하는 나 자신을 위한 나의 보호색이다.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며 그 광활한 자연 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보는 것. 

또 연민의 감정을 가지는 것. 음악에 천재적인 모차르트는 인간적 실수와 미숙함으로 가득했다. 영화에도 그런 부분이 충분히 보이도록 묘사된다. 그러나 한 사람 질투에 눈이 먼 살리에리만 그것을 보지 못했다.  


타인을 관찰하는 그 힘으로 자신을 보아야 한다. 

조금 더 객관적으로 자신을 향한 시야를 확장해 가야 한다. 

그리고 마음이 성장하기까지 또한 참고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때가 차면 조금씩 그러한 소모적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 속에서 말씀 속에서 그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것이 가능했다.  

다윗왕 그토록 아름 답던 완벽한 청년의 실수와 몰락을 바라보았다. 

야곱 지혜롭고 영리하여 형을 이겼으나 상처로 가득한 영광을 얻었던 사람 

자리 다툼하던 제자들은 한 치 앞의 자신을 모르는 무지 속에서 모두가 예수님을 배신했다. 


인생은 다양하고 그래서 세상은 발전하고 있음이다. 하나님은 그 다양함을 특별히 사용하시었다. 

그 과정 속에 인생이 놓여 있으니 우리의 씨름의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그러면 자유와 평화와 안식이 밀려오고, 보다 더 좋은 자신의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고 이제는 생각하게 되었다.




기도의 손..
이 그림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가 생각난다. 

1490년대에 두 명의 젊은 화가 '알브레히드 뒤러'와 '프란츠 크닉스타인'은 제비를 뽑아서 한 사람은 공부에 전념하고 한 사람은 그 비용과 생활을 책임지기로 한다. 유럽으로 건너가  화가로서 대성공을 거둔 알브레히드는 프란츠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돌아왔다.  하지만 알브레히드는 자신의 친구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프란츠는 친구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너무도 힘든 노동을 하다가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옆으로 비틀어지기까지 했다. 그의 가늘고 예민했던 손가락들은 이제는 완전히 망가져 섬세한 붓 터치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 후, 알브레히드는 약속도 하지 않고 친구를 방문했다. 그런데 친구는 마디진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비록 자신은 더 이상 화가가 될 수는 없지만 친구의 성공을 빌어 주고 있었다. 위대한 천재 화가 알브레히드 뒤러는 재빨리 그 충실한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했고 나중에 이 그림을 '기도하는 손'이라는 제목의 걸작으로 탄생시켰다     


(기도하는 손-'알브레히드 뒤러'독일 뉘른베르크 출신 르네상스 시대 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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