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3: 감정과 회복)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달려와 안으시니라" (누가복음 15:20)
― 아버지의 언어 속에서, 하나님의 품을 배운다.
눈부시게 살아낸 하루들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평범한 삶을 장엄하게 바꾸어 주었다.
국민 배우 김혜자의 목소리와 얼굴은 세월의 흔적을 넘어 경외감을 자아냈고,
고단한 노년조차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했다.
그녀의 수상 소감 속 대사는 다시 한번 대중을 울리고 위로했다.
내 삶은 때로는 불행했고 때로는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런대로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노년은 위대함이 아닌 평범한 날 속에서 충만함을 발견한다.
그 읊조림에 나는 힘을 얻었고, 공감은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아버지의 삶, 눈부심으로 다가오다
그 순간 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결코 대단한 인생을 산 것이 아니었다.
단 하루도 지게를 내려놓지 않고 무거운 짐을 지셨고, 자식들 길을 닦으며 등이 휘어지도록 일하셨다.
그 고단한 삶이 이제야 내 눈에는 눈부심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 그것이 내 눈물의 이유였다.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의 말을 나무람으로만 여겼다. 늘 치열했고 전투적이었으니까.
"공짜가 제일 비싸다"
"안 먹고 배부른 놈 없다"
"지름길이 제일 더디다"
"해 뜨고 누워있는 부자는 없다"
이런 말들은 방학과 공휴일마다 노래처럼 반복되었다.
논밭에서 게으름을 피우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꾸지람이었다.
그때는 귀찮게 들렸지만, 지금은 내 생각과 입술에서 한숨처럼 흘러나온다.
세월이 흐른 뒤, 아버지의 말은 달라졌다. 연민과 따뜻함이 묻어났다.
모성으로 가득한 언어에 자식들은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하늘아래 우리 아이들만큼 잘하는 게 어디 있나! 둘째 간다 하면 내가 죄가 많지!"
"너무 애쓰지 마라! 좋은 날 살았다. 다 할 만큼 했어! 나는 인제 죽어도 괜찮애."(치료 거부하시며..)
"크리스마스가 니는 좋다 그랬제! 내가 축하할라꼬 전화했다."
"니는 어예 시간이 가면 뭉테기 돈 한번 만져볼라나!"(걱정의 다른 말)
"그저 어려운 사람 보태주는 거! 그것도 괜찮애."(칭찬으로 걱정하기)
얼마나 애틋한가?
이런 말들은 내 인생에 체력을 보태 주었다.
적어도 나의 생애의 절반을 빛나게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의 언어 속에서 나는 자주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란 이름 속에는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함께 있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마25:21)
아버지는 자녀들의 인생을 착하고 충성되다 말씀해 주셨다.
그 칭찬은 우리에게 힘이 되었고, 미래를 축복으로 가득히 덮어 주었다.
아버지의 인생은 여전히 육 남매의 삶 속에 눈이 부시게 빛나게 살아계시다.
걷다가 힘들어 가던 길을 걸터앉은 나는
모든 사라져 감에 대한 허무와 절망 속에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다잡아
절반은 아버지를 위하여
그리고 절반은 나의 아이들을 위하여
눈이 부시게 나 또한 눈이 부시게 오늘을 살아낼 것이다.
( 2024년 5월 18일 눈이 부신 어느 날 아버지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