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의 드라마 눈이 부시게..그 대미를 장식한 주인공 김혜자의 내레이션은 평범한 삶을 비범하고 웅장하게 만들어 주었다. 세월을 세긴 늙은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에 경외감을 입힌 영상미가 눈물을 훔치게 만들었다. 노년의 고단함 속에서 아름다움이 배어 나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연말 시상식장에서 그녀는 감사의 인사로 드라마 속의 대사를 던지며 다시 한번 대중을 위로했다. 평화롭고도 따스한 그녀의 글을 담아본다.
내 삶은 때로는 불행했고 때로는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런대로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대단한 것만이 인생이라고 여기며 살았던 젊음은 이제 저물었다.
별거 아닌 오늘을 살아 내고자 하여도 혼신의 힘을 다 하며 지금을 살고 있다.!!
길지도 않았던 나의 삶이지만 시름으로 가득하였다.
그것을 눈부심이라 표현하는 그 말에 힘을 얻고, 위로와 격려를 얻었다. 어느덧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그런 동일한 선상에서 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는 대단하지 않은 하루를 넘어서 대단하지 않은 인생을 사셨다....그는 한순간도 지게를 벗어던진 적이 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사셨다. 일생 자식들 앞길을 빗자루질하시며 등이 휘어진 그 삶이 자식의 눈에 이제야 눈이 부시게 다가온다. 그래서 흐르는 눈물 그것이 내 눈물의 이유였다.
그런 아버지의 인생은 세월이 더해질수록 새로움으로 변해갔다. 무엇보다 그 언어가 아름답게 변해가고 있음을 문득문득 느끼게 되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나는 아버지의 언어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늘 치열하고 전투적이라 나무람으로 여기고 살았다. 생존에 대한 부담과 부지런 함에 대한 강조와 절약에 대한 숙제쯤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반복 반복 반복 ...가장 기억에 남는 레퍼토리는
"공짜가 제일 비싸다"
"안 먹고 배부른 놈 없다"
"지름길이 제일 더디다"
"해 뜨고 누워있는 부자는 없다"
이런 말들을 방학과 공휴일에 노래처럼 부르셨다. 논과 밭에서 꾀를 부리거나 게으름을 부리면 여지없이 혼을 내시며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모른 채 못 들은 채 하던 말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생각 속에서 그리고 내 입술에서 지금 한숨처럼 새어 나온다.
그러던 아버지를 요즈음 뵐 때면 말의 새로움과 따스함이 묻어난다. 아버지의 언어가 이렇게 따뜻했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모성의 측은함과 연민이 묻어나는 언어의 품격을 느낀다. 그 속에서 자식들은 위로를 받곤 했다. 여든이 넘은 나의 아버지가 그립다면 아마도 그 말의 따스함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뱉어낸 말을 변함 없이 지켜내고 있기 때문이다.
- 하늘아래 우리 아이들만큼 잘하는 게 어디 있나! 둘째 간다 하면 내가 죄가 많지!
(장윤정 콘서트 후 )
- 너무 애쓰지 마라! 좋은 날 살았다ㆍ모두 다 할 만큼 했어!! 나는 인제 죽어도 괜찮애ㆍ
(병원 치료 거부하시며)
- 크리스마스가 니는 좋다 그랬제! 내가 축하할라꼬 전화했다.
- 니는 어예 시간이 가면 뭉테기 돈 한번 만져볼라나!!
그저 어려운 사람 보태주는 거!! 그것도 괜찮애..
(안될걸 알지만 그래도 또 한번 던지시던 아프도록 걱정어린 말씀)
얼마나 애틋한가?
이런 말들은 내 인생을 고이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적어도 나의 생애의 절반을 빛나게 만들어 주었다.
어렵고 어리던 날에 아무것도 못한 채 보내 드린 엄마에 대한 미안함을 씻어주는 말... 오직 가족만이 아는 언어로 삶을 격려하며 용기와 기력이 솟게 하는 말.. 아버지의 언어 속에서 나는 자주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란 이름 속에는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함께 있었다.
(유난히 추워하신 그날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
마태복음 25: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아버지는 나의 인생을 그리고 우리 형제들의 인생을 착하고 충성되게 봐주셨다. 그것은 가득한 위로이며 그리고 자식들의 앞날에 대한 무한한 축복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그 칭찬을 마음에 세기면 배부름과 훈기가 있어 살만큼의 힘을 얻는다.
우리 육 남매를 키워낸 아버지의 삶은 고단함과 기다림 속에서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ㆍ나는 여전히 실수와 부끄럼으로 가득하지만 좀 더 이른 때에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도록 빛나는 삶을 살아낼 것이다.
무엇보다도 절반은 아버지에게
그리고 절반은 나의 아이들에게
눈이 부시게 더욱더 눈이 부시게 오늘을 살아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