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의 생존법 - 다정
아닌 척했지만 10분을 걸었을 뿐인데 다정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에르메스에서 구입한 쁘띠 스카프가 땀에 젖을까 얼른 풀러 에코백에 접어 넣었다. 한 블록 앞에 그들의 목표지점인 평양냉면 집 간판이 보였다. 점심시간 피크 타임이 막 지난 후였지만 차도 사람도 정신없이 얽혀있었다. 뒤에서 걸어오는 간호사들의 표정은 불만으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모른 채 했다. 직원들이 차를 타고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르지 않았지만 5천 원이라는 발렛비는 다정의 계산 속에 과한 금액이었다.
- 이제 다 왔어요. 걸어오니 운동도 되고 좋은데요!
매장 안으로 들어가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서귀포 해변에라도 선 듯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너나 할 것 없이 뜨거운 면수는 제쳐 놓고 얼음물을 찾았다. 전날 이미 인터넷으로 메뉴를 공부하고 온 다정이었지만, 마치 처음인 듯이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올 때마다 냉면 가격은 올랐고, 이깟 냉면이 15000원이라는 것이 어이가 없었지만, 그 슴슴한 국물의 감칠맛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 자 먹고 싶은 거 골라봐요. 여기는 냉면이 제일 맛있어.
다정을 빼고 세명의 간호사는 뻔한 메뉴를 보며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김간은 5만 원이 넘는 수육이 눈에 들어왔지만 물냉면을 시켰다. 이십 대의 앳된 두 명의 간호조무사 둘도 각각 물냉면과 비빔냉면을 시켰다.
- 다른 거 뭐 더 시켜야지? 만두 같이 먹을까요?
- 네 좋아요.
시금 떨떠름한 표정의 간호조무사들이 침묵을 지키는 동안 김간이 형식적인 웃음을 띠며 다정의 의견에 맞장구를 쳐주며 식탁 옆의 벨을 눌렀다. 개업멤버인 김간은 경험적으로 다정이 그렇게 얘기한 이상 다른 옵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물냉면 두 개, 비빔냉면 하나, 만두 한 접시, 물냉면 사리 하나 주세요.
- 확인하겠습니다. 물냉 두 개 물냉 사리 하나 비냉 하나 만두 한 접시요.
- 네.
간호조무사 둘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냉면은 이미 우리를 위해 준비해졌던 것처럼 삽시간에 배달되었다.
- 사리는 어디로 드릴까요?
- 여기로 주세요.
- 아니에요. 원장님 제가 먹을게요.
- 아니야 아냐. 난 원래 위에 소고기 고명 안 좋아해요. 김간이 물냉 드시고, 내가 사리 먹고. 자 맛있게 먹자고.
사리는 냉면 한 그릇의 반값보다 조금 더 나갔지만 고명만 없을 뿐 일반 냉면과 양이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 올 때는 시킬 수 없었다. 월 1회 있는 회식은 대체로 다정이 먹고 싶었던 음식인데 혼자 먹기는 어려운 요리 위주로 선택되었지만, 여름은 역시 냉면이었다. 비용도 아끼고 혼자 다 먹지 못해 시킬 수 없었던 만두도 먹을 수 있으니 아주 만족스러운 회식이었다. 식사가 끝나면 의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병원운영에 대한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었는데 냉면을 먹으면 윗집의 카페에서 음료를 50% 할인해서 먹을 수 있는 것도 다정은 미리 계산해 두었다.
- 원장님, 여름이니까 아이스커피도 좀 샀으면 좋겠는데요.
간호조무사 1이 마치 중대사를 제안하듯 어렵게 말을 꺼냈다.
- 아이스커피?
- 네. 환자분들도 여름이라 차가운 음료 찾으시는 것 같고요.
- 환자들이요? 가정의학과 오시는 분들이 대체로 감기몸살인데 아이스가 꼭 필요할까?
- 꼭은 아니지만……
- 농담이야 농담. 우리가 이런 얘기 허심탄회하게 하자고 갖는 회식인데. 긍정적으로 고려해서 반영해 보겠습니다. 다른 의견 없으시고요?
- 사무 용품 필요할 때 원장님 진료 중이시면 들어갈 수가 없는데요. 꼭 필요한 비품을 일부 데스크에 보관하는 것은 어떨까요?
- 데스크 밑 공간이 그렇게 여유롭나?
다정은 지방 곳곳에서 페이닥으로 일하면서 원장에 따라 병원 운영에서 줄줄 새는 비용이 얼마나 많은지 내 눈으로 보게 되었었다. 창고와 탕비실의 비품은 물론, 절대 손대어서는 안 되는 약품까지 도난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병원을 오픈하면 비품실과 약물보관을 원장실 안쪽에 마련하리라 일찍이 계획을 세워뒀었다. 볼펜하나까지 스스로 관리한다는 것이 다소 쪼잖해 보이기는 했지만, 큰 그림으로 봤을 때 옳은 일이라는 자부심이 컸다. 그런 자부심과 계획성이 수년만에 지방을 전전하던 페이닥에서 강남은 아니지만 서울특별시에 자신의 병원을 오픈할 수 있는 힘이었다.
- 그 문제는 매주 필요한 비품을 미리 월요일 오전 회의 때 정리해서 기안 주시면 그날 제공하는 것으로 정리할까요?
- 아. 네.
- 다른 의견들 있으면 편히 얘기하시고요.
다정은 핸드폰 중고차거래 어플을 뒤적이며 건성건성 말했다. 한 달 넘게 중고 포르셰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겨우 맘에 드는 차를 발견하여 막상 가보면 시트에 담뱃불 탄 자국이 있거나, 트렁크에서 개털이 발견되고는 했다. 지금 타고 있는 벤츠는 시골에서나 존재감이 있지 서울에서는 앞집 뒷집 안 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다정을 곁눈질로 쳐다보며 김간은 아이스커피에 꽂힌 빨대를 쪽쪽 빨고 있었다. 다정은 가져온 텀블러에 남은 커피를 들고 일어설채비를 하였다.
- 어휴. 경보로 가도 겨우 도착하겠다. 먹었으니 이제 일하러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