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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May 29. 2023

Z. 훌륭해진다는 것.

지금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훌륭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거 아세요?

자존감이 높다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존감이 높으면 덜 스트레스받고 덜 휘둘리고 덜 불행합니다. 나 자신이 편한 거죠. 내가 좀 못해도 내가 좀 부족해도 내가 좀 실수해도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이미 충분한 존재이기에 아기돼지 삼 형제의 셋째네 벽돌집처럼 아무리 늑대가 와서 후후 입김을 불어도 산산이 부서지지 않습니다.  


물론 자존감에 있어서, '진정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하고 존중하게 된다.'라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자존감이 높아서 훌륭한 사람도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하지만, 학자들이 규정하는 자존감의 개념과 그 범위가 꽤 다르다 보니 높은 수준의 자존감과, 일반적으로 흔히 말하는 자존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냥 자존감이 높다고 하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재밌게도 어떤 연구에서는 자신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더 폭력적인 경향이 있다고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훌륭함의 개념을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훌륭해지느냐 일 것입니다.


저는 훌륭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거든요.

이전에 쓴 글 "고난이 보석입니다"에서도 얘기했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강해지고 훌륭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고난을 피하고 훌륭할 일 없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이 피해 지지 않는 것을 알기에 뭔가 대비해야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동시에 공부 안 하는 청소년처럼,

"에잇, 발등에 불 떨어지면 그때 하지 뭐"하는 마음도 있지요.


제가 생각한 훌륭함은 고통과 탁월함이 디폴트였습니다.

고난을 견디고 역경에도 다시 서는 힘이 있는 사람.

자신을 희생하는 괄목할 만한 이타성이 있는 사람.

세상을 크게 이롭게 하는 아이디어와 천재성이 있는 사람.


그래서 훌륭해진다는 것은 참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왜냐면 저는 남에게 피해를 안주는 정도지 이타성이 높지도 않고

고난은 어쩔 수 없이 견디는 뚝심은 있는데 억울함과 분노를 주는 고난은 결코 못 참거든요.

어릴 때부터 천재는 전혀 아니었고, 나이가 들수록 새롭게 이로운 아이디어는 더 안 떠오르고요.

그나마 잘하는 것이라면 너무 크지 않은 역경에 다시 서는 힘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기르는 동안은 발등에 불이 뚝 떨어지는 때가 꽤 많습니다.

멧돼지 같은 아들을 기르는데 어찌나 화나는 일이 많은지...

그렇다고 매번 똑같이 멧돼지가 되어 화를 낼 수도 없고

육아는 저에게 고난이고 훌륭한 사람은 그 고난을 견디고 다시 도전하고

설령 자식(놈)이 멧돼지어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노를 잘 참을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 고민을 하지만 잘 안되고...

그래서 저의 레퍼런스 그룹 대표 (사회적으로 애매한 일들에 일반적 기준의 답을 주는 사람), 친언니에게

아들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으며


"내가 꼭 훌륭해져야 하냐?"라고 질문 같은 한탄을 했습니다.


대표님 왈

"그 정도 참는 건 네가 훌륭해지는 게 아니야. 저 밑에서 평균으로 올라오는 거지. "


아하!


저는 훌륭함을 고민을 해야 할 것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했던 겁니다.

어쩌다 보니 자존감이 높아서 지금이면 뭐든 괜찮아에 심취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한 동안은 그래 기본만이라도 하자는 마음에,

아들이 아닌 나의 분노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름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이 남았죠.

도대체 뭐가 훌륭한 거야?

진짜 내 생각은 옳은가?

훌륭한 것이 뭐 대단한 건가?


내가 뭐 내세울 것이 있나 하고 찾아보았습니다.


- 나는 환경을 사랑하고 환경을 지키기 위해 실천적인 노력(재활용, 일회용기사용자제, 에너지 절약, 미니멀라이프, 환경단체 기부 등)을 한다.

- 일과 인간관계에서 자신감 있고 생명에 대한 사랑이 많다.

- 사랑하는 사람에게 외도, 바람, 배반, 사기 같은 치명적인 상처를 준 적은 없다.  

- 수전도 스스로 교체 및 수리할 수 있고, 시계 무브먼트 분해와 조립도 가능하고, 문고리 교체와 수리도 가능하다.  

- 뭐든 시작하면 꾸준히 한다. 일도 공부도 글쓰기도 남편 도시락 싸기도 강아지 산책도^^

- 대학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스스로 생활비를 벌었고, 졸업 후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경제적으로 의지한 적이 없다.

- 초등학교 4~5학년 때부터 바쁜 엄마를 대신해 나와 언니들의 도시락을 쌌다.    


생각해 보니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천재도 아니고 화를 잘 못 참고 그릇은 간장 종지만큼 작지만 이 정도면 됐다~ 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 너 이 정도면 수고했고, 훌륭해. 라고요.


어릴 때는 엄마 발음만 잘해도, 심부름 하나만 잘해 와도 훌륭하다고 칭찬을 들었는데,

왜 어른들이 되면 훌륭함의 기준도 갈수록 높아질까요.

마땅히 그래야 하긴 하는데, 높은 기준으로 부족함을 느낀다고 실제 더 훌륭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냥 오늘을 또 꿋꿋이 살아서,

일하기 싫은데 그래도 늦지 않게 출근한 나를,

강추위에 나가기 싫었지만 강아지 산책을 빠지지 않고 시켜서,

밥 하기 싫었지만 프라이 대신 파송송 넣은 계란말이도 하고 된장찌개도 끓인 나를

훌륭하게 생각합니다.


나의 선샤인,

당신은 훌륭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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