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가지도 도망가지도 못해.
지난 이야기
17. 병신새끼 깝치니까!
서로를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은호의 방황은 점점 더 심해진다. 윤영은 은호의 학폭 피해자를 찾아가 용서를 빈다.
윤영은 지수의 오토바이에 탔다. 그의 등과 허리를 꼭 안았다. 지수가 속도를 높여 달리는데 긴장 때문에 전율이 느껴졌다. 그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윤영은 눈을 꼭 감았다. 자신의 생명을 그에게 완전히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치 그와 한 몸처럼 느껴졌다. 한 번도 누군가의 등에 이처럼 기대 본 적이 없었다. 등을 내어 주는 사람도 없었고, 있다 한들 덥석 기대지도 못했다. 언제나 혼자였고 같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배신당했다. 어쩔 수 없어 혼자 버텼지만, 매 순간 힘들었다. 이 어린 남자아이에게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이렇게 꼭 붙들고 있는지 한심했지만, 놓을 수 없었다. 그냥 좋았다. 혼자가 아니었고, 그의 등이 너무 따뜻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경기도 변두리의 캠핑장이었다. 운영하지 않는 것 같은 캠핑장은 잡초가 무성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지수는 창고로 보이는 곳에서 장작과 버너와 냄비, 컵 같은 캠핑 장비들을 가져왔다. 캠핑 의자를 펴니 먼지가 잔뜩 묻어있고 거미 몇 마리가 부산하게 도망쳤다. 지수가 의자의 먼지와 벌레를 탁탁 털어냈다. 오토바이 캐비닛에서 하얀 수건을 꺼내와 윤영의 의자 위에 깔아 주었다. 외곽으로 나온 데다 해가 뉘엿뉘엿 지니 공기가 싸늘했다. 앉아있는 윤영에게 지수가 자신의 재킷을 벗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지수는 라이터로 장작에 불을 붙이려 안간힘을 썼지만 좀처럼 불이 붙지 않았다. 장작은 눅눅해 보였고, 그런 나무를 태우기에 불은 너무 약했다. 바싹 마른 잔가지라도 가져다주고 싶었지만, 윤영은 그런 지수를 그냥 지켜봤다. 한참 동안 장작을 가지고 씨름하던 그는 드디어 작은 불씨를 키워냈다. 등은 땀에 젖고 손과 신발은 지저분해졌지만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버너에 물을 끓여 언제 챙겨 왔는지 모를 사발면을 가져왔다. 둘은 말없이 라면을 먹었다.
- 너는 왜 그렇게 예뻐?
당황한 지수가 사레에 들려 컥컥 거리며 말했다.
- 뭐가 이렇게 매번 훅 들어와요.
윤영은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다 가득 차면 나도 모르게 나온다고 말할 수 없었다.
- 넌 너무 예뻐.
- 남자한테 예쁘다니. 헐.
-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았어?
- 라이딩하는 형들이랑 몇 번 왔어요. 아는 분이 하시던 캠핑장인데 망했나 봐요.
- 여자 친구랑 왔던 거 아니야?
- 아니에요!
- 왔나 보네. 선수네 선수.
- 와! 아니라니까요.
지수가 얼굴이 빨개지며 항변했다. 윤영은 그런 지수가 귀여웠지만, 정말 여자 친구랑 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심통이 났다. 장작불이 제법 활활 타올라 주변의 온기를 따뜻하게 덥혔다.
- 이제 좀 괜찮아?
- 뭔가 좀 텅 빈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어요. 그냥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 싶어요. 솔직히 아무렇지 않아요. 달라진 것도 없고요. 그런데 엄마가 죽었는데 이렇게 괜찮은 게 더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진짜 모르겠어요.
- 사실 나도 그랬어. 아빠 죽었다고 했을 때. 아무렇지 않았어. 그런 내가 이상한 건가 생각했었거든.
- 우리 둘 다 사팬가?
- 잘 못 지내는 것보다 낫잖아. 이상한 건 그렇게 가버린 사람이지. 넌 아냐.
빨갛게 타오르는 장작불을 보는 지수가 엷게 웃었다.
- 중학교 때는 어땠어?
윤영이 화제를 돌렸다.
- 흑역사죠.
- 그땐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 알면 그랬겠어요.
- 모르니까…….
한숨이 나왔다.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는 지수의 말이 정답 같았다. 어쩌면 은호도 솔직히 말해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고 부인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은호는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알량하게 아는 것은 실제 삶에서 적용이 안 되는 때에 있었다. 남 같은 부모 아래 이 아이는 어떻게 그 시기를 견뎌왔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갈 시간이었다. 또 끊어내지 못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윤영은 더 세게 그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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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엄마는 어쩔 수 없어.
엄마의 자리로 돌아간 윤영은 다시 은호와 대화를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