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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Sep 03. 2024

거절하기 편한 사람

- 찡빠오, 오늘은 네가 짜구 발 좀 닦아줘라. 나 손가락 다쳐서.


아침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나에게 부탁했다. 남편의 새끼손가락에 0.3cm 정도의 페이퍼컷이 나 있었다. 잘 보이지 않아서 안경을 벗고서야 상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설거지를 할 때 단 하나의 그릇도 고무장갑을 끼고 씻는 남편을 고려할 때 가능한 부탁이었다.


- 그 정도 상처라면 거절! 고무장갑을 끼고 씻겨주는 걸로 하자. 엊그제 내 부탁을 단호히 거절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너 옹졸이!


오리주둥이를 하고 잠시 나를 째려봤지만 게의 하지 않았다. 이틀 전 원래는 아들이 저녁산책 후 짜구의 발을 닦아 줘야 하는데 열이 나서 누워있었다. 내가 남편에게 대신 좀 닦아주라고 했지만 남편이 그 정도는 열이 나도 할 수 있다면 대신해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주방 정리를 하던 내가 결국 짜구 발을 닦아 주게 되었다. 나머지 산책에서 누가 더 옹졸한지를 두고 서로를 놀리다가 둘 다 옹졸한 것으로 결론을 맺고 평화로운 합의를 도출하였다. 다소 앙심을 품고 있었지만, 이전 그의 거절 여부와 관계없이 남편은 거절하기 편한 사람이다.


나는 사람과의 교류가 많은 편이 아니라 사실 누군가의 부탁을 받는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럼에도 만나자고 하거나, 부탁을 하거나, 간접적인 기대를 마주할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성의 있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올해는 유독 시어머니의 기대를 우회적으로 전달받는 일이 몇 번 있었다. 3대가 모두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는 것 등이었다. 어떤 얘기는 직접 어떤 얘기는 다른 가족들을 통해 내 귀로 들려왔는데, 참 곤란했다. 나는 시간과 장소, 활동, 사람에 대해 내 선호도가 너무 강한 사람이다. 단체로 다니는 걸 싫어하고, 누구든 자주 만나는 건 싫어하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따로 있고, 가고 싶은 장소와 환경의 선호도도 구체적으로 아주 많다. 활동은 오죽하겠는가. 멀리 이동할 것 같으면 안 만나고, 소음을 싫어하고, 좋아하는 음악이 그때그때 있는데 싫은 음악은 귀를 막아서라도 안 듣는다. 냄새에 민감하고 벌레를 무서워하고 효율적 소비와 동선도 너무 중요하다. 내가 상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범위가 꽤 명확한데, 그 범위에 맞지 않으면 거절한다.


난 결국 원하는 대로 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거절하는 것이 편하진 않다. 고등학교 때 친구가 나를 두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져도 할 말은 다 하는 애였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쭉 그랬다. 거절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할 수 없거나 하기 싫은 일을 제때 거절하지 못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더 힘들다. 그래도 거절하면서도 상대의 마음도 괜찮기를 기대한다. 나의 욕심이다.


나는 사실 어머니가 손자가 방학 때 더 많은 시간을 친할머니와 보내길 바라셨다는 것을 알았다. 대놓고 말씀하진 않으시고 여러 혼합메시지를 보냈는데 나는 내게 편한 메시지를 선택했다. 내 기준으로 여름방학이 너무 짧았고, 어머님 댁에는 주변에 공장이 너무 많아 놀 수 있는 곳이 없었고, 시골집이라 잠자리가 불편했고, 짜구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걸 싫어하셔서 자고 오려면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남편과의 논의 끝에 새벽에 출동해서 밤늦게 오기로 하고 1일이지만 2일 같은 하루를 보내고 왔다. 하지만 나중에 어머니의 서운한 마음이 도련님을 통해 우회적으로 나의 귀로 전해졌다.


나는 나름 신경을 썼는데 어머니가 결국 서운해하셨다는 것에 억울함을 느끼고 남편에게 항변하기 시작했다. 말이 좋아 항변이지 화를 냈다. 아침부터 나의 융단폭격을 듣던 남편이 말했다.


"갈등이 될 일도 아닌데 왜 갈등을 만들어?"

"왜 이게 갈등이 아니야? 내가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나한테 서운해하시는데!"

"너한테 뭐라 하는 게 아니잖아. 서운할 수도 있지. 어떻게 다 만족해. 엄마도 그냥 서운할 수 있고 그게 큰 일은 아니야. 서운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남편이 짜증 내듯 말했지만, 그 내용 자체가 나에게는 굉장한 생각의 전환이 되었다. 나는 누군가 나에게 서운해하면 그것이 내 기준에서 합당하면 괜찮았지만, 아니면 억울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와 기준이 같지 않고 그래서 내 노력여하와 달리 서운해하면 속상했다. 그러면 그 감정은 나에게 큰 스트레스가 되고,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남편은 내 잘못이 아니라도 누군가 서운할 수 있고, 그래도 괜찮다고 그게 그렇게 큰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좋은 말인데. 아주 맘에 들어!"


남편은 내가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니 역시 찡빠오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었다.


어머니는 나를 바꾸려고 또는 비난하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런 마음이었다는 것을 막내아들에게 말씀하신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평가 없이 그냥 공감하면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서운했던 것은 남편의 말처럼 '큰 일'은 아니다. 어머니도 그도 나도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마음이다. 반드시 누구의 잘못인지 가해자를 찾고 책임소재를 가를 일이 아니다. 그저 공감하는 것. 상대는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는 것 말이다. 내가 누군가의 기대를 다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그들의 마음을 알아줄 수는 있다.   


이제까지 남편이 거절하기 쉬운 사람이었던 것은 여러 요인이 있지만, 내가 거절해도 그는 별로 상처받지 않기때문이었다. 잘 삐지지 않고 뒤끝이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서운한 때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운해도 나를 탓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남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렇게 큰 일은 아니었던 거다. 그래서 나는 그를 안전하게 느끼고 편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거절하기 편한 사람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 단단한 사람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거절당하는 것이 괜찮다. 물론, 나는 상대의 부탁에 성의 있게 대해줬는데 너무 기브  테이크가  되는 사람은 꺼려진다. 하지만, 이해할 만한 상황이고 설령 그렇지 않아도 왠만하면 괜찮다. 그런데 나는 거절당해도 괜찮으면서 내가 거절하면 다른 사람은 대단히 상처받을 거라고 과하게 생각하고 오버해서 방어했다. 남편 말처럼  일이 아닌데 말이다. 내가 괜찮듯 상대도 괜찮을 거다.  


저녁밥을 먹고 산책 중이던 남편이 전화를 했다.


- 컴퓨터에 다운로드 파일에 사진 넣어놨는데 보고 현상할 것 좀 골라봐.

- 싫은데. 그건 너무 큰일이야. 오늘 할 수가 없쪄.


(큭큭큭) 나는 단단한 그를 믿고 또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하지만 내일 점심으로 연어회를 주면 함박웃음을 지을 그를 생각하며 마트에서 그가 좋아하는 생연어를 사 왔다.   



화요일의 감사


- 시어머니가 서운한 것이 내 책임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남편에게 감사합니다.

- 듣기 싫은 얘기도 참고 들어주는 남편에게 감사합니다.

- 나의 잦은 거절에도 쿨한 남편에게 감사합니다.

- 그럼에도 내 부탁을 잘 들어주는 남편에게 감사합니다. (그래, 내가 더 옹졸하다.)

- 시어머니가 강요나 비난 없이 며느리의 의견을 존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나의 부탁을 성의 있게 들어준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 감사합니다.

- 이제까지 내가 한 거절에도 내 옆에 남아준 단단하고 훌륭한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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