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내가 목줄에 매어진 개 같다.
그리고 가끔 야생의 늑대 같다.
우리 집 반려견 짜구는 양아치다. 한없이 순진한 얼굴을 하고선 강약약강의 대명사다. 10년 넘게 도시의 가정에서 훈련받았으나 여전히 목줄이 없으면 들개마냥 본능대로 활개친다. 심지어 목줄에 매어 있을 때도 자주 꼴갑을 떨어서 주인인 나를 창피스럽게 만든다. 10년째 매일 산책할 때마다 같은 종족인 개를 보면 달려드는데 완전 꼴불견이다.
특히 작은 개에게 더 한다. 13kg의 누렁이 짜구는 커다란 골든 리트리버나 사모예드 같은 개들을 만나면 꼬리를 내리고 포메라니안이나 미니 비숑 같이 작은 개들을 만나면 송곳니를 드러내고 달려든다. 물론 큰 개를 만나도 주인이 뒤에 있다고 생각하면 감히 이빨을 드러내고 하이에나처럼 털을 세운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너무 가까이 달려갔을 때는 흠칫 놀라 오줌을 지린 적도 있었다. 우리는 짜구가 그럴 때마다 목줄을 세게 움켜쥐고 부끄러워 죽겠다며 짜구를 나무란다. 개뿐이 아니다. 까치를 봐도 달려들고, 고양이를 봐도 달려든다. 그것이 짜구의 본성이고 동물로서의 생존본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에 타면 간식을 받아먹기 위해 얌전하게 앉아 우리를 바라본다. 우선 엘리베이터에 다른 개가 있으면 우리가 타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타서 앉기만 하면 간식을 주기 때문에 짜구는 파블로브의 개처럼 미리 간식을 기다린다. 수년간 마주치는 이웃들은 그런 짜구에게 어떻게 이렇게 얌전하냐며 칭찬을 해준다. 그럴 때면 마치 모범생 아들을 둔 것처럼 어깨가 으쓱하다.
본능을 잘 참으면 칭찬을 받고 그렇지 못할 때는 혼나는 짜구를 보며 이게 진짜 옳은 것일까? 짜구는 행복할까? 의문이 들곤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간과 잘 섞여 살지 못한 다는 것을 알지만 씁쓸하다.
하지만 인간이라고 다른가. 인간은 평생을 본능, 욕구, 충동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솔직히 개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 않다. 욕구를 잘 참으면 인정받고 그렇지 못하면 욕을 먹는다. 아니, 사회로 부터 도태되고 사람들로 부터 외면받는다. 우리는 매일 다이어트와 건강을 위해 식욕을 참고, 화가 나면 솟구치는 분노를 참고, 놀고 싶고 쉬고 싶은 충동을 참고,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본능에 없는 배려까지 해야한다.
나는 종종 내가 목줄에 매인 개 같다.
그리고 가끔 야생의 늑대 같다.
상담을 할 때 나는 내 욕구는 매어 두고 이성 대로 행동한다. 상담을 한다는 것은 동네에서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일이 아니다. 내담자의 문제를 분석하고 개념화해서 그가 원하는 목표를 위해 최선의 방법으로 개입해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드라마나 예능을 보며 마치 감독이라도 되는 듯 참견하는 게 취미이며 어떻게든 대화 중에 웃음을 만들고 싶어 하는 내 본래 성격은 현관문 앞에 잘 놔두고 와야 하는 것이다. 표정도 말 한마디도 본능대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렇게 잘 통제하고 효과적으로 계산된 행동을 할 때 상담의 효과도 높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도 나는 충동이 적거나 충동을 잘 억제하는 편이었다. 보이지 않는 목줄을 스스로 부여잡고 바우더리를 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돈에 있어 그랬고 공부할 때도 이성을 만날 때도 그랬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부모님이 용돈을 주면 착실히 모았다.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사고 싶은 것도 참으며 은행에 가서 매달 적금을 부었다. 얼마까지 써도 된다는 계획 없이 돈을 펑펑 써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느 날은 사고 싶은 것을 한번 사보겠다고 문구점에 갔는데 플라스틱으로 오므렸다 늘릴 수 있는 알록달록한 머리핀을 샀다. 머리를 묶으면 다 흘러내려와 결국 쓰지도 못했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돈도 써본 놈이 쓴다고 워낙 안 쓰다 보니 써도 될 때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아주 가끔 있는 소비는 그렇게 어른이 될 때 까지도 매우 드물고 결과물이 형편없었지만, 통장의 돈은 차곡차곡 쌓였다.
중고등학교 때의 유일한 목표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그 목표를 위해서라면 모든 욕망을 숨도 못 쉬게 꽉 묶어 둘 수 있었다.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유일한 생존전략인 것처럼 느꼈다. 개미가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먹이를 모으듯 다람쥐가 도토리를 숨기듯 학창 시절 내내 성인이라는 한파가 닥쳤을 때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나는 공부했다. 놀고 싶고 자고 싶은 욕구를 참고 그날 그날 해야 할 공부를 성실하게 해 나갔다.
연애를 할 때도 그 습관은 없어지지 않았다. 내가 키스하고 싶을 때가 아니라 키스해도 될 때 키스했다. 나의 성욕은 사회적인 통념이라는 자물쇠를 달고 가끔은 나조차 열쇠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잘 숨겨져 있었다. 아무리 매력적으로 보여도 안전하지 않은 남자는 만나지 않았다. 여러 외형적 조건이 괜찮은 사람이고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보이는 성격을 단박에 믿는 법이 없었다. 불신하고 의심하고 지켜보고 다시 확인했다. 나에게 발톱을 드러낼 사람이라는 단서가 아주 조금이라도 보이면 나는 마음을 철저히 닫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상대를 점검했다. 그러다 나에게 지쳐 가버려도 그뿐이었다. 나 역시 그런 남자는 필요 없었다. 그 결과 한 번도 나쁜 남자에게 상처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태도가 나를 지팔지꼰으로 만드는 비극을 피하게 해 줬다고 믿는다.
내 욕구대로 살지는 못하였으나, 그로 인해 나는 안전했고 칭찬받았고 평탄했다.
내 목줄을 '탁' 소리가 나게 끊는 것은 분노였다.
누구든 날 건드리면 미친개처럼 달려들었다.
싸울 때는 죽는 각오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도 가족들이 나를 미친 개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힘이 세고 나보다 4살이나 많은 큰언니와 종종 싸웠다. 나는 언니라는 이유로 나에게 명령하는 것에 순종하는 일이 없었다. 항상은 아니지만, 자주 그런 언니와 싸웠다. 먼저 화를 내는 것은 대부분 언니였다. 가져다 달라는 물을 갖다 주지 않아서, 내가 먼저 잡고 있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주지 않아서 같은 시답잖은 이유였다. 언니가 나에게 욕을 하거나 한 두대 때리면 나도 달려들었고 그러다 싸움이 나면 난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언니를 이빨로 물었다. 나는 여기저기 엊어터져서 멍이 들어도 금세 나았지만 나에게 물린 언니의 상처는 빨리 아물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는 나보다 힘이 센 남자애들이 괴롭혀도 참지 않았다. 손에 힘이 달리면 연필로 찍어서라도 나에게 함부로 하는 아이들에게 당하지 않았다.
남의 바운더리를 넘지 않았지만, 내 바운더리를 넘어오는 사람은 그게 누구라도 물었다.
나는 대체로 잘 묶여 있는 개 같이 살았으나 내 구역이 침범당한 순간에는 망설임 없이 이빨을 드러내는 늑대가 되었다.
나는 가끔 무엇이 진짜 나 다운 모습인지 헛갈릴 때가 있다.
나는 이제 목줄이 없어도 짖지 않고 타인을 물지 않으며 정해진 길을 벗어나지 않는다.
평온하고 안전하며 재미없다.
나는 날카로운 이빨로 목줄을 자르고 늑대가 되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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