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의 생존법 - 진형
진형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필 정수리 중앙에 동그랗게 하얀 두피가 민들민들 빛나고 있었다. 40대 중반이 넘었지만 풍성한 머리숱은 그녀의 자랑이었다. 그런 그녀가 탈모는 아닐 테고 말로만 듣던 스트레스성 원형탈모라고 생각하니 애써 참았던 분노가 쑥 올라왔다.
진형이 잠도 잘 못 자고 회사에서도 도통 일에 집중하기 어려워진 것은 두어 달 전부터였다. 중3이었던 아들이 겨울방학이 되면서 학원을 바꿔달라고 했을 때는 이제 제대로 공부를 하려는 것인가 싶어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집에서 멀고 학원비도 비쌌지만 수업만 알차다면 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한 달간은 아들도 뭔가 열의에 차서 주말에도 학원 문제집을 펴고 숙제를 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기특한 모습에 몇 개월 전부터 아들이 염원하던 신상패딩을 거금을 들여사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놀라운 모습은 신기루처럼 언제 거기 있었느냐는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들은 주말이든 밤이든 핸드폰만 잡고 있기 일쑤였고, 학원에는 가는 것 같은데 공부를 하는지는 의문이었다. 아들 몰래 들춰본 학원 교재는 앞부분 열몇 장 빼고는 손도 대지 않은 듯이 깨끗했다. 그렇다고 사춘기 아들을 닦달해서 공부를 확인하고 강요할 수도 없었기에 진형은 속앓이를 하면서도 아들을 지켜만 보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진형의 눈에 불꽃이 튄 것은 아들이 학원을 바꾸고 한 달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집으로 오지도 그렇다고 전화를 받지도 않는 아들을 찾으러 진형은 꼭 갈 필요 없는 편의점을 간다는 핑계로 집을 나왔다. 아들이 내리는 버스 정거장 앞이 보이는 편의점 안 쪽의 테이블 앞에 앉아 만원에 네 캔짜리 맥주를 사서 한 캔을 따 먹고 있었다. 두 캔을 거의 비워가던 때 아들이 누군가와 버스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아들은 진형이 사준 신상 패딩과 똑같은 패딩을 입은 긴 생머리가 찰랑거리는 여학생을 옆구리에 꼭 끼고 있었다. 누가 더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북하게 딱 붙어있는 것이 2인 3각으로 서로를 꽉 묶어놓기라도 한 것 같았다. 진형은 자신도 모르게 마시던 맥주캔을 꽉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진형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아들은 여자애를 꼭 껴안고 이마와 정수리에 뽀뽀를 하는 것 같았다. 진형은 편의점 문을 벌컥 열려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창밖에서 그들을 감시했다. 지금 나갔다가는 분명 또라이 엄마라는 취급 밖에 받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때부터였다. 잠도 잘 안 오고 아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온 신경이 곤두섰다.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아들의 핸드폰을 주시했다. 진형은 강아지들을 살피기 위해 설치했던 CCTV를 현관과 거실, 아들방 쪽으로 슬며시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자신이 일을 하러 간 사이 아들이 여자친구와 단둘이 집에 들어와 있을 생각을 하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수도 없이 핸드폰으로 집안 상황을 체크했다. 얼마 전에는 예능프로나 드라마에서 처럼 아들이 임신한 여자친구를 데리고 나타나는 악몽도 꾸었다. 하지만 회사에도 집에서도 이런 고민을 속편히 나눌 사람이 없었다. 회사에 있는 MZ세대 들에게 얘기해봤자 극성스러운 엄마라는 이미지만 줄 것 같아 말할 수 없었고 남편에게는 얘기해 봤자 알아서 하게 두라는 팔자 좋은 소리나 할 것이 분명했다.
진형은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에 생긴 동그란 땜빵을 가리기 위해 가르마를 이리저리 바꿔보았다. 어떻게 해도 스타일이 살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이 흉측스러운 탈모가 늘어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커졌다. 갑작스럽게 대머리 할머니가 되어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거기까지 상상이 가니 이제는 아이만 안 생기면 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진형은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퇴근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늘따라 일이 많았고, 쓸데없는 회의는 지지부진 길어졌다.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 헐레벌떡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뒷자리에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남자애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나눠 끼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자니 한숨이 나왔다. 진형은 발길을 재촉하여 정거장 근처의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 요새 젊은 애들이 잘 쓰는 콘돔 있나요?
- 콘돔이요?
- 네. 애들이 잘 쓰는 것으로요.
- 청소년한테 콘돔 판매는 금지인데요.
- 콘돔을 안 판다고요? 그럼 애들이 임신이라도 하면...
- 네?
- 아니에요. 그럼 그냥 잘 나가는 걸로 한 박스 주세요.
진형은 맥주를 마시며 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빈속에 맥주를 마시니 취기가 금방 올라오는 것 같았다. 네 캔을 다 마시도록 아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는 너무 졸려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허탈한 마음에 콘돔 한 박스를 비닐봉지에 담아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갔다.
- 엄마!
아들이 뒤에서 진형의 어깨를 탁 하고 쳤다.
- 어후. 애 떨어질 뻔했잖아.
- 뭘 그렇게 놀라.
- 왜 이렇게 늦게 다녀?
- 엄마야 말로 이렇게 술 마시고 늦게 다녀도 돼?
- 너 여자 친구는 어디 갔냐?
- 무슨?
- 나도 다 알거든.
- 알았어?
- 그럼. 내가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 그런데 몰랐어?
- 뭘?
- 헤어졌지. 한참 됐는데.
- 헤어졌다고?
-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 글쎄 헤어졌어.
아직 피지 않은 벚꽃 송이가 가로등 불빛에 비춰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여전히 겨울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봄이 오고 있었다.
- 엄마 봉지에 있는 건 뭐야?
- 아니야 아무것도.
-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뭐야?
진형은 콘돔 봉지를 가방 속에 넣어 있는 힘껏 집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