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 15편에서 이어집니다.
종혁의 눈앞에 어깨 높이까지 올라오는 서류 탑이 세워졌다. 층층마다 처마처럼 삐져나온 태그가 이 서류 탑을 세운 이의 노력을 증명하는 듯했다. 특별히 아랫사람을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급한 일은 늘 존재하기에 사람은 사람을 몰아세울 수밖에 없음을 어떤 위치에 도달하기 전에는 이해시킬 수 없다. 이해를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이 종혁의 솔직한 입장이었다. 삭막한 이 세상에서 따뜻한 관계는 오히려 면역을 떨어트릴 뿐. 섣부른 온정 뒤에 찾아오는 겨울이 더 춥다는 것을 종혁은 이미 어린 나이에서부터 깨달았던 것이다.
의뢰인에 대한 사전조사는 필수였지만 자료가 제시간에 맞춰 도착하는 일은 드물었다. 한 사람의 삶을 조사하고 감시하는 일은 대상의 일상적 불안과 변화에 대한 민감도, 그리고 복잡하게 꼬인 인간관계에 따라 진척도가 천차만별이었다. 그런 이유로 조사 결과 보고서는 빠르고 늦다의 개념보다 조금 늦었느냐 아니면 많이 늦었느냐를 따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목표 대상의 경계심을 부추기는 것보다는 차근차근 접근하고 풀어나가는 편이 실행팀으로서도 훨씬 이득이었기에 표면상으로 드러나는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뒤늦게 도착한 자료를 검토하느라 이미 하루가 시작할 시점에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버린 가냘픈 운명이 종종 빚어질 뿐.
30년 전에 헤어진 쌍둥이 동생에게는 특별한 애정도 그리움도 안타까움도 없었다. 종혁은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자신에게 가족은 없는 것으로 못 박았다. 그것은 체념이라기보다는 단념이었다. 희망을 부여잡고 살다가 빼앗기느니 애초에 스스로 뿌리까지 솎아내는 것이 종혁의 생존전략이었다. 완벽하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현재에 집중하는 눈빛을 보였던 종혁은 유토피아 관리자의 눈에 띄었고, 알약 실험의 도구로 쓰이다가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여타의 아이들과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다.
오래 전의 동생이 어쩌다 이런 집단에 아이를 맡기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는지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일었지만 그뿐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일반화된 관념 또한 허구에 불과함을 종혁은 지난 수십 년간 목격해온 사건들에서 여실히 깨달았다. 아이의 남은 수명만큼 알약을 지급한다는 공고문이 나돌자 수많은 부모들이 아이를 넘기겠다며 자진해서 연락을 취해왔다. 종혁은 그 현실을 보고서야 과거 우연히 들었던 조각난 부모의 통화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납치되던 날의 지극히 비상식적이고 이상했던 부모의 행동도. 그들은 종혁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팔아넘긴 것이었다.
유토피아 관리자는 어린 종혁에게만큼은 부모의 소식을 자세히 전달해주었다. 그들의 대응은 너무 보잘것없었다. 경찰서를 찾아가 아이 잃은 부모의 모습을 연기했고, 경찰은 수많은 납치와 실종사건에 파묻혀 제대로 된 수사조차 하지 못했다. 무슨 연유였는지 두 사람은 뒤늦게나마 종혁의 행적을 파헤치기 위해 직접 나섰지만 유토피아에서 변심한 부모들을 처리하기 위해 흔히 쓰는 상투적인 수법에 걸려 석양 뒤의 그림자처럼 사라져 갔다. 종혁은 부모가 그처럼 처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특별한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유토피아에서 종혁을 발탁하기로 확정 지은 것은 그 직후였다. 그 증거로 종혁은 함께 갇혀있던 아이들과 분리되어 새로운 장소로 옮겨졌고 비로소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자신의 쌍둥이 동생이 아이 아빠라는 사실은 실행팀을 담당하는 종혁에게 새로운 옵션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공포와 불안, 의구심과 추측, 그리고 절망과 환희를 불러일으킬 사건을 일정 비율로 혼합해 그들의 일상 곳곳에 배치시키면 목표로 하여금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었다. 적절한 미끼를 던진 후 종혁이 아빠 행세를 하며 아이를 데려오면 그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아이는 지금 종혁의 눈앞에 있었다.
'이름이 세진이라고 했던가?' 종혁은 눈앞의 아이를 바라보며 신비로운 감상에 젖어든다. 자신의 딸이 아님에도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닮은 부분이 눈에 들어오는 아이. 아이가 종혁을 바라보는 눈길 또한 마찬가지다. 아까의 반가움보다 이제는 은근한 두려움과 어색함의 커튼이 드리워졌음에도. 이 아이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종혁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실행팀이 데려온 많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길들여진 후 점차 본 뿌리에 대한 감정과 기억은 희석될 것이며 훗날 부모의 품에 돌아가더라도 스스로의 의지로 그곳을 박차고 나오게 될 것이다. "세진아. 아빠랑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종혁은 스스럼없이 안겨든 세진을 품에 안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