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할 수 없던 게 사라지는 건 아니란다

by 작가 전우형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할 수 없던 게 사라지는 건 아니란다. 어른이 되었어도 물을 무서워하던 나는 사라지지 않아. 다만 이제는 수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두려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 되었을 뿐이지. 이 두 가지를 적절히 조합하면 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척'을 할 수 있게 된단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물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은 변한 것이 없어.


소리에 예민한 사람이 있단다. 그는 큰 소리가 나는 걸 힘들어한단다. 만약 그가 콘서트장을 일 년에 한 번쯤 갈 수 있게 되거나 옆에서 아이가 소리 지르며 달려가는 걸 버틸 수 있게 되어도 그가 큰 소리를 힘들어한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단다. 다만 그 사람은 주변에서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상황을 미리 알아차리거나 정리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지. 예컨대 자신이 소리에 예민하다는 것을 미리 알려준다거나, 시끄러운 장소를 가급적 피한다거나, 하루 중 가장 소란스러울 시간에 외출을 나간다던지, 누군가가 큰 소리로 화를 내거나 고함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던지 하는 것들이란다. 할 수 없던 걸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완하는 법을 익히는 거지. 이런 방식들에 익숙해지면 마치 소리에 예민하지 않은 것처럼 자신을 포장할 수 있게 된단다.


이런 방법들은 다른 사람을 덜 불편하게 하는데도 사용된단다. 예를 들면 배려심 깊은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이 소리에 예민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미리 조심스러워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 그건 서로가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막는 벽이 될 수 있으니까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 이제 괜찮다고,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거야. 그런데 이걸 가끔 무신경한 사람은 오해를 한단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가면서 버티는 법을 배운단다. 이건 관리, 적응, 유연성, 승화, 해소, 조절과 같은 여러 가지 말로 다르게 표현할 수 있어. 여러 가지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없었다는 걸 드러내지 않는 법을 익힌단다.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는 건 아냐. 그저 속으로 삭히거나 다른 방법으로 풀어낼 수 있는 주머니의 용량이 늘어난 것뿐이지. 하지만 이런 방식에는 분명 한계가 있단다.


아플 때 바로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과 참고 버티는 사람이 있어. 참고 버티는 사람이라고 해서 아픔을 못 느끼는 게 아니겠지? 그는 문제를 덜 일으키고 싶은 사람이거나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해보려는 사람이란다. 단지 미련해서가 아냐. 매번 날을 세우며 뾰족한 말로 찌르지 않아도 언젠가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봐 줄 거라는 걸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 물론 이런 믿음은 실망할 때가 더 많단다. 칭얼대고 떼쓰는 동생을 더 많이 챙겨주는 엄마를 지켜보는 첫째처럼, 울분에 차는 날도 많을 거야.


맞아. 어떤 일들은 표현하지 않으면 모를 수도 있단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나 법칙, 유불리의 문제라기보다는 '태도'의 문제란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 그 태도를 갖지 않으면 우리는 그가 물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착각하기 쉽단다. 또 그가 큰 소리에도 아무렇지 않고, 아픔이나 고통에 무감각하다고 생각해버릴 수도 있어. 하지만 그건 그의 진짜 모습이 아냐. 그의 '진짜'를 보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하단다. 그 태도란 바로 '관심'이야. 관심을 갖고 보면 실은 그가 물 앞에 설 때마다 남몰래 손바닥의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어. 어떤 때는 유난히 숨을 깊이 몰아쉬고 과장된 동작으로 손발을 털어내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지. 그가 늘 귀마개를 백팩 옆주머니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에 넣어 다닌다는 것, 큰 소리가 들릴 때 눈을 지그시 감으며 호흡을 고른다는 것, 나와 만나기 전까지 콘서트장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란 것, 그가 가끔 혼자 가슴을 부여잡다가 바깥으로 잠시 나갔다가 돌아온다는 것 등을 알 수 있단다.


우린 생각보다 남에게 관심이 없단다. 그래서 어떤 관계들은 헛돌기만 해. 관심 없이는 그를 제대로 볼 수 없단다. 단지 아침에 일어났을 때 꼭지를 깔끔하게 따서 씻어놓은 딸기를 무성의하게 집어먹다가 '더 없어?' 하고 물을 뿐이지. 누군가가 새벽부터 일어나서 다른 가족들 잠을 깨울까 봐 개수대에 물을 졸졸 틀어두고 딸기 꼭지를 따다가 손가락을 배었다는 건 알 수 없단다. 오히려 손가락에 감은 밴드를 보며 어이구 칠칠치 못하긴 하고 핀잔을 주거나 아니면 아예 그 사람이 손을 다쳤다는 것조차 말해주지 않으면 모를 수도 있어. 그는 속으로 섭섭해하겠지만 티 내지 않을 거야.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걸. 알아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뭐. 그런데 왠지 온종일 칼에 밴 손가락이 쓰라릴 거야. 그리고 쓰라림이 느껴질 때마다 아침의 대화를 곱씹겠지. 손가락만큼 속도 쓰리지만 그쯤 되면 뭐, 익숙해져서 느낌도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느낌이 없어도, 느끼지 못해도 상처는 눈처럼 소복소복 쌓인단다.


우리가 누군가를 관심 없이 바라보는 건 그의 숨은 아픔과 노력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과 같단다. 물론 상대방이 감추려 하는 것들을 억지로 들춰낼 필요는 없어. 하지만 그가 어떤 노력을 왜 하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필사적으로 용기내고 있는지, 공포를 잠재우려 애쓰는지, 힘든 순간을 견디려 하는지, 슬픔, 놀람, 울분 같은 것들을 삭히려 하는지 생각하고 고민해볼 필요는 있단다. 그런데 뭘 알아야 고민도 할 수 있단다. 관심도 없고 보려는 마음도 없다면 고민을 시작할 수조차 없어. 목소리 큰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참고 양보하고 따라주는 사람들이 대부분을 떠받치고 있단다. 관심은 그 모든 묵묵한 이들을 위해 놓지 말아야 할 태도라고 생각해보면 좋겠구나.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할 수 없던 게 사라지는 건 아니란다. 이 말을 이렇게 바꿔 말할있을 것 같구나. 버텨낼 수 있다고 해서 고통이 없는 건 아니라고. 다툼과 갈등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건 어느 한쪽이 버텨주고 있어서란다. 공짜 평화는 없어. 지금도 묵묵히 그저 속으로 삼키는 이가 있음을, 너의 즐거움과 평화는 단지 네 노력의 당연한 결과물이 아님을 떠올려본다면 조금은 달라진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