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월 Apr 17. 2024

'세피한' 것들이 까분다

경상도 사투리 용례

어제도 남편은 11시가 다 돼서 퇴근했다. 남편에 따르면, 요즘 남편 회사는 무척이나 바쁘다고 한다. 올초에도, 작년에도 남편은 일주일에 두어 번은 11시가 되어야 퇴근을 하였다. 남편의 늦은 퇴근의 이유는 대부분 시차가 다른 나라에 있는 고객과의 미팅 때문이라고 한다. 하루는 미팅으로 늦고, 또 하루는 그 미팅을 준비하느라 늦고. 회사는 '회의를 하기 위해 모인 사기업'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밤늦은 퇴근 후 집에 들어오는 남편의 얼굴은 대개 죽상이었다. 노랗고 깔끔한 호박죽이 아니라, 여러 번 끓이고 덥혀 새알도 불어 터지고 보랏빛이 죽은 쥐색으로 바랜 쉬어버린 동지팥죽상이었다. 뭍에 올라온 지 한참 된 동태 같은 눈을 하고 "하, 회사 다니기 힘들다"라고 할 때면, 나는 "니가 고생이 많다"라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어제는 달랐다. 예정된 회의가 있는 날도 아닌데 퇴근이 늦었던 남편은 죽상 얼굴이 아니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고추장찌개 얼굴이었다. 소파에 앉자마자 안경을 탁자에 툭하니 던져 놓았다.

"왜, 뭣땜에 그러는데? 회사에서 뭔 일 있었나?"

나는 남편의 손을 잡으며 살며시 물어보았다.


점잖은 양반의 입에서 시궁창 소리가 나왔다.

"ㅅㅂ, 암것도 아인 것들이. 즈그가 뭐 안다고 이리 해라 저리 해라. 일 할 줄도 모르고 일도 안 하는 것들이. 입만 살아갖고는. 입으로 하는 일, 누가 못하노!"


"누가 글카는데? 언 놈이 우리 신랑보고 이리 해라 저리 해라 카드노, 으이? 내가 한 떽까리하까?"

대신 화를 내주어야 했다. 같이 분풀이해야만 했다.


"현장도 모르고, 으이! 기술도 모르고, 으이! 고객한테는 끽, 소리도 못하는 것들이. 우리 보고만!"


다른 부서와 고객 불만 사항 때문에 회의를 하다가 남편의 부서가 많이 까인 모양이었다. 고객의 불만을 해결하려면 추가 원가가 소요되는데 영업이나 구매부서에서는 추가 비용 없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우기는 모양이었다. 최후방에서 업무를 버텨야 하는 부서의 숙명이다.

뭐라고 구체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처지도 아니어서 상투적인 위로만 줄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아쉬웠다.


"쎄피한 것들이 맞제? 까분다 맞제? 금마들 다 세피한 것들 아이가? 원래 세피한 아~들이 까불어 제낀다 아이가? 마 그러려니~ 해라"


남편은 피식 웃었다.

"맞다. 세피한 것들이 까불고 있다. 원래 까부는 것들은 세피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똑똑하고 진중한 내가 참아준다."


나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래 그래. 우리 신랑은 똑똑하고 점잖으니 그까짓 세피한 아~들 하는 짓거리 신경 끄고 무시해라. 니만치 잘하는 사람이 어데 있노? 그거도 까불어 놓고 밤잠 못잘끼구마는."


하루가 지나가는 다 늦은 밤, 까부는 세피한 것들을 폄하하면서 우리는 두 개의 소주잔을 서로 부딪혔다.



*세피하다: 하찮다, 의 경남 방언이다. 주로 별 것도 아닌 것이라는 느낌일 때 많이 쓴다. 사람과 사건 모두에게 다 쓸 수 있다. 학교 일진이라고 소문났는데 직접 보니 '세피하네' 라던가, 큰 일일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세피하네, 별 거 아이네.'같은 경우에 주로 쓴다.


 

이전 06화 알코올 램프는 '뚜껑'을 덮어야 꺼집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