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인문학] 여름의 색.

글쓰기를 좋아하는 도시여자가 시골에 적응해 가며 끄적이는 농부되기프로젝트

by 작가 박신


검정.

모내기가 끝나고 여름이 시작될 즈음이다.

흙은 씨앗과 모종을 품기 위해 검은 비닐을 덮는다.

여름의 햇살 아래에서 검은 비닐을 덮는 건 꽤나 고된 작업이다.

그늘 하나 없고, 주변은 온통 검어져 모든 열기를 흡수한다.

그 뙤약볕 속에서 검은 비닐을 들고뛰고

삽으로 흙을 퍼서 비닐을 고정하면서

왠지 모를 울분이 솟구쳤다.

열받아.

난 왜 그때 그렇게 하지 못했지?

난 왜 그 순간 그 말을 못 했지?

갑자기 분한 일들이 연달아 떠오르며

내 몸의 열기에 맞춰 속을 뜨겁게 달구었다.


두어 시간 일을 하고 나니 드디어 쉬는 시간.

시원한 냉수를 들이켜니 정신이 번쩍 든다.


내가 덮어둔 검은 비닐을 되돌아보니

그제야 마음이 좀 누그러진다.


그래.

내 속을 뒤집어 놨던 사건과 사람들 덕에

이불속에서 밤잠을 설치던 시간이 있었잖아.

어쩌면 내 다음 씨앗을 위해서였을지도 몰라.

검은 비닐을 덮고 잠잠히 새싹을 준비하는 흙이 되자.

이불 뒤집어쓰고 밤잠 설쳤으니

이제 나도 새싹을 키울 수 있을 거야.

그러니 허튼 잡초가 자라나지 않도록 조금 더 덮어두자.

그러다 새싹이 돋으면 감사로 묵은 미움은 털어버리지 뭐.




빨강.

한 여름이다.

고추를 딸 때가 되었다.

지난번 검은 비닐을 덮어둔 밭에

엄마는 서둘러 고추를 심었고, 여름에 쑥쑥 자랐다.

휴가를 다녀오니, 고추를 따야 한다고.

고추 따는 작업은 생각보다 재미있다.

초록 이파리 속에 빨간색을 찾아서 톡톡. 건들기만 해도

고추가 내 손에 들어온다.

고추와 고추 사이에서 앉아있으면 풍겨오는 적당한 매운맛은 꽤 중독성이 있다.


그렇게 고추를 따면 마당에 고추를 부어서 씻고 말리고 닦아서 빻는데,

이 모든 과정에서 온통 빨강인 속에서 조금 다른 빨강을 찾아내야 한다.

안 좋은 고추를 골라내는 것이다.

고르고 고르는 작업.

따내고 자르고 던지고

씻고 말리고 고르고 닦는 작업.


어딘가 모르게 마음을 정돈하는 것과 닮았다.

고르고 고르기.

좋아하는 취향을 따내고 고르기

씻고 말리고 닦기


그러다

내 삶에서도 썩고 아니다 싶은 것들은

툭 잘라서 휙 던져버리기.


그런데..

마음에 난 스크래치가 너무 맵고 맵다.


검은 비닐 아래에서 울분을 덮고, 빨간 고추 사이에서 마음을 고른다.

맵고 쓰라린 순간도 결국 내 삶의 양념이 된다.

여름의 검정과 빨강이 지나가면, 이제 들판은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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