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 이후, 추수를 맞이하는 자세
#오랜만에 농사 근황을 기록함.
올해는 시골과 연을 맺은 지 12년 중 최악의 흉작이다.
논에는 며루(?)가 와서 중간중간 바삭 말라버린 구멍이 보이고
그 덕에 서로 지탱하며 열매를 익어내던 벼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어지럽게 마구잡이 방향으로 쓰러져버린 벼들을 보며
내 한 자리 잘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닫는다.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내 곁의 다른 이들이 충분히 익어갈 시간을 준다는 것.
다른 이들이 잘 버티어준 덕에 나 역시 익어갈 시간을 얻는 것.
벼루 옆에 어지럽게 쓰러진 벼들을 보며
이런 깨달음(?)을 얻어
주변인들에게 새삼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시작했다.
견뎌줘서 감사해요. 버텨줘서 고마워요.
어찌 되었든 추수는 시작되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랬지.
시골로 가는 길. 들녘은 온통 황금빛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만히 멈추어 자세히 보면
군데군데 쓰러져있는 벼들이 눈에 담긴다.
추수도 역시 기계가 한다.
하지만 물론 혼자서는 절대 못하지.
아빠가 열심히 논에서 콤바인이 벼들을 담아내고
나는 도착할 위치에 포대를 매단 트럭을 준비하면
가득 실린 나락이 우수수수 쏟아진다.
포대의 균형을 이리저리 맞춰가며 채워내는 건.
역시 베테랑 모쟁이 엄마이다.
그렇게 3명이 합을 이뤄
논을 한 칸, 한 칸 비워내기를 몇 번의 주말을 거쳐하고 나면. 추수가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번 추수는 열심히 일해도 기쁘지가 않다.
800kg 포대에 한가득 담아도 키로수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이야기.
결국 농협에서 600 정도만 받아와도 괜찮다고 했다는 이야기.
비가 자꾸 왔다 갔다 하니 추수를 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
여름 내내 습하고 더운 날씨 덕에
논에 온갖 잡초가 들끓었다는 이야기.
언제나 가을 추수 때면 미소가 머물렀던 저녁 식탁에
온갖 걱정과 불안들이 오고 간다.
도시에서 살면서 나름 텀블러 쓰기, 용기 가져 다니며 포장하기 등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나름 세련되게 해 가며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시골에 오면 직격타를 맞은 기후 위기에
우리는 아직 어떤 대응법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벼가 쓰러지니, 농부도 힘이 쉬이 나지 않는다.
봄, 여름 열심히 달려왔는데 결실은 나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늘에 달려있다.
어쩌면 인생의 진리지. 그런데 농사가 아닌 일을 하다 보면 자꾸 일이 안 되는 게, 결말이 안 좋은 게 꼭 내가 열심히 안 한 것만 같아서, 내 탓인 것만 같을 때가 많다.
그게 아닌데.
걱정 어린 말들이 오가는 저녁식탁에서
아빠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한마디 하신다.
“어쩌겠니, 추수 다했으니 양파 심어야지.”
그래. 농부의 삶은 그랬지.
결과는 하늘의 뜻이고, 내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자책도 원망도 아무 필요가 없다.
내 한자리에서 나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내는 것.
이 것만이 희망이다.
벼가 되자. 그리고 쓰러지지 말자.
옆의 누구도 스러지지 않도록.
꼿꼿하게 이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버텨내야겠지만.
나를 위해, 당신을 위해, 지구를 위해
오늘을 잘 서 있어 보자.
스탠드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