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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쓴이 Apr 29. 2022

할아버지의 달걀 후라이

달디 단 그 맛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옛날 어른이셨다.


첫 손주인 내가 그저 아들이라는 이유로 금줄을 매달며 쾌활하게 웃으시던 그런 분


젊은 시절 할아버지는 이따금씩 홀연히 집을 나서 며칠, 몇 주간 돌아오지 않으시다가 손에 고기 한 근, 고등어 한 손, 돈봉투를 들고 돌아오시곤 했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기 한 달 전에도 홀연히 나가시더니 산후조리 후 시댁에 들른 어머니에게 ‘고생했다’는 무뚝뚝한 인사와 함께 눅눅한 돈봉투를 쥐어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나이보다 더 늙어질 것을 채찍질하는 지독한 농사일에 그으르고 마른 모습이셨지만, 생전 내가 팔씨름을 한 번도 이기 못할 정도로 강고한 전완근을 가진 분이셨다.


가부장적인 시대를 관통한 할아버지지만 두 여동생을 홀대하시지 않았다.


내게 항상 ‘너는 우리 집안의 장손이니 행동거지에 있어서 항상 겸손하고 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지만 동생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장손, 아들, 남자’ 등의 단어를 삼가는 섬세함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학을 독학으로 익힐 정도로 학식이 풍부하셨다.


그래서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매번 나의 소중한 방학을 일주일이나 앗아가며 시골집에 앉혀 놓고 사자소학이니 동몽선습이니 하는 고전을 가르치셨다.


15세 가을 무렵,


할머니께서는 동네 할머니 분들과 물때에 맞추어 갯일을 하러 가셨고, 할아버지는 가을걷이 직후의 여유를 느끼며 나른한 오침을 취하고 계셨다.


잠에서 깨신 할아버지는 거실에서 놀고 있는 나와 동생들을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배 안 고프냐? 뭣 좀 해주랴?”


부엌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으시던 할아버지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와서 우리 남매는 깜짝 놀랐다.


아직 초등학생이던 막내가 이야기했다.


“달걀 후라이 먹을래요!”


할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이내 몇 가지 반찬을 꺼내시고 애호박찌개를 데우셨다. 그리곤 식용유를 프라이팬에 담뿍 넣고 달걀을 세 개 깨서 지글거리는 팬에 올리셨다. 맛소금을 넣고 불을 조절하여 노른자가 살아 있는 탱글한 달걀 후라이를 뚝딱 만드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우리는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오빠, 할아버지가 요리하는 거 본 적 있어?”


“아니.. 나도 처음 봐. 맛이 있을까?”


할아버지께서 들으실까 소근소근 거리는 우리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수저 놓거라.”


근사한 식탁이 금세 완성되었다.


충분한 양의 기름, 맛소금과 깨가 조화를 이루어서 달걀 후라이에서는 감칠맛이 났다.


“할아버지! 엄청 맛있어요! 우리 할아버지 완전 요리사네. 왜 그동안 요리 안 해주셨데?!”


일찍이 밝고 사회성이 좋던 둘째의 애교 넉넉한 칭찬에 할아버지는 멋쩍게 웃으시곤


“달걀이 뭔 요리라고. 어여들 먹어라”


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날은 꽤 특별한 날이었을까. 아니면 그 후 할머니께서 집을 오래 비우는 날이 거의 없어서였을까.


할아버지는 예의 그 부엌에 출입하지 않은 분으로 돌아오셨다.


20대 중반,


내가 교직에 발을 내딛자 할아버지께서는 무척 좋아하셨다.


원주 이가 대제학공파의 족보를 달달 외시던 할아버지는 ‘몇 대 할아버지께서 홍문관에서 일하신 이례 처음으로 교육자가 나왔네, 진사가 나왔네’하시며 내가 이룬 작은 성취를 민망할 정도로 크게 부풀려 말씀하셨다.


평소 진중하고 말씀을 삼가던 분이 일관성을 잃은 것은 아마 그것이 손주의 일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나지 않아서 할아버지의 건강이 빠른 속도로 나빠졌다.


염려되는 마음이야 당연했지만 현실감은 거리와 반비례하는지 수백 킬로미터 밖에서 앓고 계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선뜻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오랜만에 고향에 방문하여 할아버지 댁에 갔다. 여윈 할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어색하여 꼭 우리 할아버지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시골집 LPG 가스통을 교체해야 하여 내가 나섰는데 할아버지께서는 굳이 본인이 하신다며 나를 물러나게 하셨다. 꽤나 무거운 LPG 가스통이 노환을 앓는 칠순 넘은 노인의 손에 움직일 리가 만무했다.


준엄한 목소리로 꾸짖으신 적은 있어도 감정을 실은 화를 낸 적은 거의 없던 할아버지는 본인의 몸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것에 분함을 느끼셨는지 짜증 섞인 소리를 내시곤 집으로 들어가셨다.


뒷정리를 하고 들어가니 할아버지께서 소파에 힘 없이 앉아 계셨다. 그러다 문득 눈이 반짝이시더니 내게 말씀하셨다.


“OO이 배 안 고프냐. 할아비가 달걀 해주랴?”


의외의 제안에 깜짝 놀랐다. 거의 10 몇 년 만이려나.


평소 같았으면 아니라고, 내가 챙겨 먹겠다고 말씀드렸겠지만 어쩐지 그날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과장되게 기뻐하며 좋다고 이야기했다.


떨리는 손으로 달걀 후라이를 해서 상에 내주신 할아버지께서는 ‘아이고’ 소리를 내며 앉으셨다. 본인은 드시지도 않은 채 이제는 소처럼 장성한 손주가 식사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달걀을 한 입 집어서 입에 넣는 순간 나는 놀라고 말았다.


도무지 달걀 후라이에서 날 것 같지 않은 이상한 맛이 났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달지?’


움찔거리는 혀가 ‘어서 이 음식의 상태가 이상함을 알려라!’고 독촉하는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할아버지가 해주시는 달걀이 제일 맛있네요!’


흘긋 가스레인지 쪽은 보니 아뿔싸, 올리고당 통이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식용유와 헷갈리신 모양이었다.


노쇠한 할아버지께서 본인의 실수를 알아채는 것을 막기 위해 나는 더 맛있게 음식을 먹고 후다닥 상을 치웠다.


그리고 주방을 정리했다.


가을볕이 더워서인지 땀이 자꾸 난다며 샤워를 해야겠다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단내는 이내 솟아나는 눈물의 짠기가 금방 눌러버렸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웠는지 한참 꺽꺽대며 울었다.


한 달 뒤, 할아버지께서는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급하게 병원을 찾았다. 면회할 때 할아버지께서는 내 얼굴을 보시곤 소년처럼 웃으셨다.


“아가 왔냐. 밥은 먹었지? 오매 이쁜 내 손주”


근엄함을 잠시 내려놓은 순수한 사랑의 말들에 나는 또 눈물이 났다.


나는 출근을 위해 다시 서울로 향했다. 내가 일상을 살아내는 동안 할아버지께서는 생사를 다투고 계셨다.


그리고 일주일 뒤, 할아버지께서는 소천하셨다.


빈소에 앉아서 허탈한 눈물은 닦으며 생각해보니 내게 마지막 달걀 요리를 해주시고자 눈을 반짝이던 그때가 할아버지의 회광반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날 할아버지께서 해주신 달다 못해 쓰던 달걀이 이따금씩 생각난다.


그것을 맛있게 먹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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