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성비가 참 떨어지는 인생이구나’ 깊은 자괴감에 빠진 날이 있었다. 건강 문제로 미루던 석사 논문을 더 이상 연기하지 못하고 써야 했을 시기의 일이었다. 저체중인 몸 상태로는 여전히 무리였다. 몸의 여러 호르몬들이 몹시 저하되어 있는 상태라 영양제를 맞고 호르몬 주사를 맞기 시작하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격주로 병원에 가 영양제를 맞고 집에 와서는 이틀에 한 번씩 스스로에게 주사하면서 이렇게라도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가도 어느 날은 자괴감이 모든 감사함을 이겼다. 버는 돈은 적은데, 버티기 위한 삶을 위해 나가는 지출을 보며 구멍 난 독에 물을 붓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당장 생명이 위험한 것도 아닌데 내가 받는 치료가 앞으로 내가 산출할 가치들에 비해 과한 투자가 아닌가 고통스러웠다. 이렇게 살다가 가족들에게 진 빚을 갚지도 못하고 죽으면 어떻게 하지, 아니 그러면 다행이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득했다. 마이너스 인생이 흑자 전환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인터넷 최저가 검색에 시간을 많이 보나면서도 '가성비'라는 단어는 써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혹시나 경제적인 가치 외에 다른 것을 간과할까 싶어 물건에도 잘 쓰지 않던 표현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씁쓸하고 허탈했다. 쓰지 않으려 노력하던 단어를 처음 써본 대상이 나에게 라니. 나 자신을 그렇게 보기 시작한다면 언젠가는 그 잣대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들었다.
늦은 밤 친구에게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친구는 그럴 땐 그저 생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라고, 원래 동물이든 인간이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생존인데 현대 문명 덕분에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친구의 말이 맞았다. 사람은 얼마나 쉬이 사그라들 수 있는 존재인가. 문명 이전에는 동물들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혹독한 날씨나 자연재해에서 살아남고, 오늘 하루 양식을 충족하는 등 ‘하루의 생존’이 기본적인 삶의 단위였을 것이다. 그저 오늘 하루 살아남고 내일 아침을 맞는 것이 목표였을 것이다. 과학 기술과 의학 기술이 발전하며 인류의 수명이 늘고 수많은 고비를 넘겨나가는 것일 뿐. 그러나 우리는 그 문명에 길들여져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아득한 미래를 가늠하며 조급하고 불안해지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마이너스로 평가한다는 것, 내가 한 계산과 절망은 얼마나 오만한 짓이었을까. 때론 절망도 오만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사람을 경제적인 가치로 보는 순간 누군가를 해하는 것이 쉬워진다. 남을 해치지 않고, 나를 해치지 않고 보낸 오늘 하루, 나의 가치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감사하기 어려운 이유들이 산재해있고,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버겁지만 그럼에도 오늘 어떻게든 살아냈음을 감사하며 하루치의 은혜를 누리려 분투한다. 나도 모르게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며 하루를 돌아보는 밤이 찾아올 때면, 하루 생존한 것으로 족하다던 친구의 말이 나를 감싸 안는다. 숨 쉬는 모든 것들은 하루를 살아갈 은혜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