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May 07. 2018

재상

청백리 고불 맹사성-맹씨 행단

재상은 임금 아래 최고의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 지위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듯이 자리는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있다면 그 힘을 어디에 사용하겠는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힘을 악용한다. 아산에 가면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조선 역사상 최고의 재상이라고 추앙받는 인물인 맹사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맹씨행단이 있다. 


이른 아침에 찾은 맹씨 행단은 조용하고 아늑하면서도 고요한 분위기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재상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찾아오든지 간에 복장을 갖추고 예의를 다했으며 손님에게는 반드시 상석을 내주었다는 고불 맹사성의 행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번에는 맹사성 기념관이 없었는데 이번에 갔을 때는 맹사성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었다. 조선 역사에서 황희 정승이 했던 내용들은 비교적 많이 전해지지만 맹사성은 청백리이고 악기를 좋아하고 소박하며 진솔한 인품을 가졌다는 내용 외에 다른 내용이 많지는 않지만 세종은 맹사성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사서 중용하였다. 

맹사성(孟思誠)은 1360년(공민왕 9년) 7월 17일 수문 전제학 맹희도의 맏아들로 온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맹희도는 어린 시절부터 정몽주와 절친한 친구사이였지만 정몽주가 먼저 급제해 조정에 나아가고 이후에 절치부심하여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고려의 맹장으로 유명한 최영 장군의 손녀딸과 맹사성은 혼약을 맺게 되는데 권신들과 사찰의 비리로 고려의 기운은 이미 기울었기에 파란만장한 앞길이 예견되고 있었다. 

이성계가 집권하면서 최영 장군의 사돈집인 맹희도 집안 역시 앞날이 좋지 못했다.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맹희도는 아들인 맹사성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신은 조선에서 벼슬을 할 생각이 없지만 너는 아직 젊으니 미래를 찾아가라고 말이다. 세상의 변화를 빠르게 인정한 아버지 덕분에 맹사성은 조선에 나갈 수 있었고 조선에서 승승장구하며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사적 109호로 지정된 저 집은 청백리(淸白吏) 맹사성(孟思誠) 집안의 고택(故宅)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ㄷ자형 평면 집으로 소박한 규모다. 양쪽 방 위의 지붕 용마루가 받아 전후면에 박공을 낸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는데 처마는 홑처마다.  

대청은 우물마루와 연등천장을 이루고, 방은 온돌바닥과 간살(기둥이 벌리어 선 거리간격)을 넓게 짠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다. 대청 정면에는 들어열개의 井자살 창호를 달고, 뒷면에는 밖여닫이 판장문을 달았으며, 방에는 밖여닫이 井자살 창호를 달아 두었다. 

 맹씨행단은 말 그대로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으로 맹고불의 고택, 구괴정, 쌍행수 등을 망라하여 "맹씨 행단"이라 부른다. 맹사성은 맹씨행단의 중심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손수 심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세종대에 이르러 재상이 된 맹사성은 평소 하인이나 노비에는 관대했지만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조선대의 명장이었던 김종서를 엄격하게 조율하여 호랑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으로 만들고 자신의 뒤를 이어받을 정승으로 추천하기까지 했다. 

그는 76세라는 고령의 나이까지 일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마을을 걸어 다니기도 하고 때론 소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너무나 평범해 보여서 사람들은 그가 그냥 평범한 노인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조정에서 지급해주는 녹미 외에는 욕심을 내지 않았으며 아름다운 노년을 보낸 사람이었다. 


힘이 있어도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욕심부리지 않으며 살면 노년에 편안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연 속의 미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