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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19. 2019

창업(創業)

음성 권근 3대 묘소

필요한 인재는 자신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재를 자신의 혀처럼 구는 사람으로 착각을 하기도 한다. 순임금에는 신하가 다섯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으로 천하가 다스려졌다고 한다. 공자는 인재를 얻기 어렵다고 하면서 정말 그렇다고 말하였다. 무왕의 아버지 문왕에게는 난신이 없었으므로 천하의 3분의 2를 쥐었다고 한다. 

이번에 언급하려는 사람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인 권근이라는 사람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할 때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개국 후에 각종 제도 정비에 힘을 썼다. 이곳에는 조선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했던 권근과 그의 아들 제, 손자 람의 묘가 같이 있다. 

하나의 왕조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많은 인재가 필요하다. 조선 역시 많은 인재가 모여들어 왕조를 개창하였다. 이곳에 잠든 권근은 후에 이황에서 영향을 주기도 하였는데 그는  이와 기, 심과 성, 정과 의, 사단과 칠정 등을 이물로 보는 이원론의 입장을 취했다. 왕조에 출사 하여 예문관춘추학사 겸 대사성·중추원사 등을 지냈던 권근은 외교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여 조선과 명의 관계를 호전시켰다. 다음 해 3월 귀국하여 헌사(憲司)의 탄핵을 계기로 스스로 진정전(陳情箋)을 올려 개국 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권근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목은 이색이라는 대학자가 나온다.  목은은 고려 말기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비중이 매우 큰 정치가였고, 성리학의 토착화에 앞장을 섰던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고려왕조에 일편단심의 충성을 다 바친 정몽주, 이숭인, 길재 등이 그의 제자임은 말할 것도 없고, 새 왕조 건설에 앞장을 섰던 정도전, 하륜, 권근 등도 목은을 스승이라 불렀다.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인재이며 저물어가는 왕조 고려로 보았을 때는 마음이 변한 사람이다. 해가 저물어가는 가운데 오래되어 보이는 비석과 석등만이 그 시절을 연상케 하고 있다. "백설(白雪)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험하구나)/ 반가운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夕陽)에 호올로(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 목은 이색

인재를 말할 때면 세 가지 유익함이 생각이 난다. 예의나 음악을 즐거움이라고 하고, 남의 뛰어난 점을 말하는 것을 즐거움이라 하고, 현명한 친구가 많은 것을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이 유익하다. 

권근(權近, 1352-1409)의 저서 중에 유형문화재 제83호 ‘입학도설’은 성리학의 기본원리를 도식화하여 설명한 성리학 입문서로, 그의 학문과 경세론, 유학의 중요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조선 초의 유학연구에 필수적인 자료가 되어 학술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조선시대 5차례의 간행본 가운데 다른 판본은 다수의 전래본이 전해지지만, 유독 세 번째 간행본은 이 책 외에 국내외 전래본이 확인되지 않고 있어 다른 간행본과의 비교분석을 통한 판본 계통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누구에게 든 간에 먼저 신용을 얻어야 한다. 주군에게 신용을 얻어야 비로소 간언 할 수 있다. 신용을 얻지도 못하는데 의견을 말하면 주군은 자신을 헐뜯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권근은 이성계라는 주군에게 신용을 얻었던 사람이다. 초기에 많은 것에 참여를 했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일조를 했던 권근은 권학사목(勸學事目) 8조를 올려 문교 시책의 시정과 보완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1409년(태종 9) 58세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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