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대장 도제찰사 운강이공 전승기념비 및 경모각
전통적인 유교 관념에 따른 충군애국 정신도 견지하고 있었으며 의리와 명분에 더 깊이 경도되어 있었던 사람으로 문경의 운강 이강년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타성에 젖어 무사안일의 관망적 자세를 보이던 양반 권세가들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어서 이들이 일제 침략세력과 결탁함으로써 민족을 도탄에 빠뜨렸다고 간주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비교적 일찍 의병을 일으켰던 운강 이강년은 10여 년간 학문 수양과 사상적 무장을 갖추고 다시 봉기한 것은 을사늑약 이후인 1907년 봄이었다. 1967년 8월에 갈평 전투 승전 60주년 기념으로 지역 주민들의 발의로 전적지 갈평에 ‘창의대장도체찰사운강이공전승기념비(倡義大將都體察使雲岡李公戰勝紀念碑)’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의병을 이끌고 일본에 대항해 항일전을 하던 운강 이강년은 청풍에서 일본군에게 잡히게 된다. 부상으로 피체될 때 그는 시를 남긴다.
무정하다 탄환이여
발목을 상해 나아갈 수 없도다
차라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욕 없이 저 세상에 갈 것을
보통 경모각에서 경은 공경할 경을 많이 사용하는데 운강 이강년을 기리는 경모각은 볕경을 사용하였다. 햇살이 든다는 의미를 부여했던 것일까. 운강 이강년은 유학을 했기에 야은 길재의 삶도 잘 알았을 듯하다.
“봄가을 변함없는 대나무 빛으로 절의를 다지고/ 밤낮없이 흐르는 시냇물로 탐욕을 씻네/ 마음속 밝고 고요하여 티끌로 더럽히지 않았으니/ 이제야 도의 단맛을 알게 되었네.” - 야은 길재
갈평리에서 일본군에 맞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한 운강 이강년은 9월 16일에는 싸릿재,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단양 고리평(故里坪), 10월 23일에는 풍기 백자동(柏子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강년은 부대에서는 군기를 제대로 세웠지만 철저한 애민정신이 발로 된 결과 항일전을 전개하는 동안 각지 주민들의 보호에 깊은 애착을 보이며 민폐를 제거하였다고 한다.
1858년(철종 9) 12월 30일(음력) 경북 문경군(聞慶郡) 가북면(加北面) 도태리(道胎里, 현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에서 아버지 이기태(李起台)와 어머니 의령 남 씨 사이에서 태어난 운강 이강년은 명문사족으로서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하였지만 향촌사회에서 유교의 학문을 닦고 도의를 숭상하는 가풍이 있는 집안에서 자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