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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10. 2020

나아가지 않다.

과거와 벼슬을 포기한 윤증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은 모두 소중하지만 살아온 것만으로 죄가 되기도 한다. 죽음으로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표현하는 것은 정통 유학자의 삶이라고 말해왔다. 그렇지만 자식을 위해 생환한 윤선거는 그 행동으로 인해 평생 비난을 받으면서 살았으며 그의 아들 윤증 역시 굳이 나아가지 않고 자신의 진로를 고향에서 보내는 것으로 마음먹는다. 그때가 앞날이 창창했던 13세의 나이였다. 당대의 쟁쟁한 유학자들은 그의 스승을 마다하지 않았다. 우암 송시열을 비롯하여 동춘당공원의 송준길, 김집까지 그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송준길이 지금의 동춘당공원 일대에 살고 있을 때인 1652년 회덕으로 찾아가 사제 관계를 맺었으며 송시열과는 1657년에 만나 사제 관계를 맺게 된다. 고향에 살면서 유학자의 삶을 걸어가고 있던 윤증에게 송시열의 영향은 과히 지대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명재 윤증고택은 그의 삶이 느껴지는 곳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어떤 성과를 이루었다고 해서 자신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별것이 아닐 수도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하나의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견해의 차이일 뿐이고 자신이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대스승이었던 우암 송시열에게 윤증은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표현하며 회니시비라고 유명한 사건을 만들어낸다. 

일찍이 과거와 벼슬을 포기하고 논산에 세거 하면서 살았지만 그는 수많은 사람의 천거가 있었다. 호조참의, 대사헌, 이조참판, 이조판서, 좌찬성, 우의정 등 다양한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그는 어릴 때 마음먹은 대로 나아가지 않았다. 

윤증의 집안은 대대로 장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명망 있는 집 안치고 술과 장을 담그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가을이 되면 더 아름다운 곳이지만 다시 돌로 된 솟대를 옆에 두고 위쪽으로 걸어서 올라간다. 회덕(懷德, 지금 대전시 대덕구 일대)과 이성(尼城, 지금 충남 논산시 일대)은 조선시대에 불리던 지역명이다. 윤휴가 주자의 주석과 다른 견해를 제시하자 송시열은 감히 자신의 의견에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것을 보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했다. 자신의 생각을 윤선거와 윤증에게도 강요하였다. 

모든 일이 하나의 가치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여 가치가 높다고 볼 수는 없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가치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기거하던 윤증은 1714년(숙종 40) 1월 24일에 85세의 긴 삶을 마치게 된다.  

그는 지나친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아들과 후손들에게 양잠을 금지했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 명재 윤증고택을 찾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보인다. 각자 다른 이유로 찾아왔을 테고 어떤 느낌을 받을지는 각자의 몫이다. 명재 윤증의 삶을 보면서 자신이 생각한 대로 살고 아무리 대학자나 지위가 높다고 하더라도 올바르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면서 온화하면서 청렴한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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