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개의 고장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는 데 있어서 생각 외로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있다. 고려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후백제의 견훤과 그의 아버지로 알려진 아자개다. 둘 다 아들과의 균열로 인해 결국 도움을 준 셈이니 묘한 것이 인생이다. 지금 가은지역은 옛 상주지역으로 통일신라 말 호족세력이 득세를 할 때 아자개가 웅거 하던 곳이기도 하다. 아자개는 신라진흥왕과 사도 부인(思刀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구륜공(仇輪公)의 후손이라고 한다.
아자개는 처음에는 이 지역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지만, 신라 하대의 혼란기에 전국 각지에서 농민을 포함한 지방세력이 봉기하자, 그도 885년(헌강왕 11)∼887년(진성여왕 1)에 사불성(沙弗城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을 근거지로 군대를 일으켜 장군을 자칭하였다. 당시 호족세력들은 마치 지금의 국회의원들과 비슷한 느낌이다. 지역마다 세력과 지지기반을 토대로 활동하며 자신의 발언권을 확장시켜나갔다.
이곳 가은읍에는 아자개의 이름이 붙여진 장터를 비롯하여 곳곳에 아자개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가은읍은 탄광으로 유명한 곳이어서 과거에는 이곳의 상권은 상당히 활성화된 적이 있었다. 한참 탄광산업이 주축을 이루었을 때는 20,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에 거주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되었던 광산을 1960년대에 인수해 경제개발의 바탕을 마련했던 것이다.
안쪽으로 들어오면 지금은 코로나 19 때문에 잠시 운영이 중단된 아자개 장터가 있다. 1994년에 폐광하게 되면서 기존 은성광업소 부지에 석탄박물관을 건립했는데 그 앞에 문경 에코랄라가 자리하고 있다.
아들인 견훤이 892년 무진주(武珍州)를 점거하고, 900년(효공왕 4) 완산주(完山州)를 근거로 후백제를 세운 이후에도, 아자개는 계속해서 상주지방에 웅거하고 있었으며, 918년(태조 1) 7월에 마침내 고려에 항복하였다. 왕건은 호족들의 지원으로 통일왕조 고려를 세우는데 성공을 한다. 지금의 정치와 다른 것은 전쟁을 통해서 한 것만 제외하고 비슷한 느낌이다.
장터는 마치 옛날의 장터를 연상케하듯이 만들어두었다. 몇 년 전에 장터가 열릴 때 와본 적이 있는데 지방을 오가는 상인들과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장터가 어우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폐역이 되었지만 가은역 역시 석탄을 나를 때만 하더라도 활성화된 기차역이었다. 지금은 철로 자전거를 타는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가은지역의 명승고적으로는 조령관문이 있는데, 옛날에는 한양을 내왕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날이 좋아서 그런지 탁 트인 가은읍의 풍광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가은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가은현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주흘산과 조령산이 병풍처럼 둘러선 문경지역을 대표한다. 아자개장터는 1950년대에 가은읍 5일장으로 개장하였다가 2011년 가은 아자개장터로 이름이 바뀌었다.
오랜 시간 무연탄을 채굴하는 탄광지역이었으나 석탄산업이 사양화되면서 채산성이 떨어진 탄광은 폐광이 되었다. 곳곳에는 지금도 남아 있는 찻사발의 도예공방과 숯가마가 남아 있다. 아자개가 웅거하면서 힘을 키우던 이곳은 1914년 세 면의 여러 동리가 합쳐져 가은면으로 하여 13개의 동리를 관할하였으며 1973년에는 읍으로 승격하였다가 1986년 문경군에, 1995년 문경시에 속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