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철학
문경은 비교적 시원한 지역이었는데 요즘에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이른 더위에 기석은 사과농장에서 적지 않은 땀을 흘렸다. 매년 하는 일이지만 사과맛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사과를 사서 먹는 사람들은 그냥 맛있는 것 혹은 가격대에 맞춰 사과를 사기 때문에 모르겠지만 기석은 미묘한 맛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기석은 오토바이를 타고 헬멧을 썼다. 산이 높기에 문경은 해가 빨리 떨어지는 편이지만 요즘에는 해가 길어져서 가는 길에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아도 잘 보였다.
지나가다 보니 문경새재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맘때면 문경에서는 찻사발이라는 그릇을 가지고 축제를 여는데 그 축제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어릴 때는 그냥 아무데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그릇인데 그걸 찻사발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집에서는 그냥 밥그릇, 국그릇, 반찬 그릇으로 쓰는 사기그릇인데 요즘에는 전국적으로 많이 유명해졌다고 한다. 집에 도착한 기석은 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 대청마루에 펼쳐져 있었다.
밥상이 차려져 있는데 몇 가지 반찬과 캔맥주가 놓여 있었다. 대문 열리는 소리를 들은 그녀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오빠 왔어요? 씻고 식사해요."
"네가 상을 차려놓은 거야?" 기석은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 낯설었다. 그녀는 싱글 생글 웃으면서 앉으면서 말했다. "원래 전에 살던 집에서도 자주 차려본 거예요. 물론 반찬은 대부분 시장에서 구입한 것이었지만 오늘은 특별하게 제가 만든 달래 두부조림이 더 추가되었어요."
그녀에 말에 대답 없이 기석은 말없이 화장실로 들어가서 샤워를 했다. 일을 하고 나서 하는 샤워는 항상 기분이 좋았다. 샤워를 끝낸 기석은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예전 같았으면 팬티만 입고 나갔겠지만 이제는 바지와 위에 티까지 입고 나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지영은 말을 걸었다.
"샤워 다했어요? 식사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낯설었다. 덜 말린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상앞에 앉았다. "밥도 네가 한 거야?"
"예. 입맛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취향을 말해주면 물량을 맞춰볼게요. 오늘 학교에서 배운 것이 바로 이 달래 두부조림이에요. 어떤지 한 번 먹어보고 말해줘요."
기석은 수저를 들어서 밥을 한 입 먹고 달래 두부조림을 먹었다. 짰다. 뱉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얼른 밥 한 수저를 더 먹고 같이 씹어서 목으로 넘겼다. 그리고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어때요?" 지영은 자신이 먹었을 때도 짜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물었다.
"뭐. 나쁘지는 않은 거 같아. 그런데 내가 달래를 많이 좋아하지는 않아." 기석은 그 반찬을 회피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을 생각해내서 그녀에게 말했다.
"아~ 그렇구나."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달래나 나물 같은 것을 다 좋아하지 않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도 수저를 들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차마 자신이 만든 달래 두부조림을 외면할 수 없어서 최대한 먹을 수밖에 없었다.
둘은 식사를 다하고 대청마루에 앉아서 자두와 캔맥주를 마셨는데 지영은 이날은 맥주를 마시지 않았다. 문경은 참 공기가 맑은 곳이었다. 서울의 공기가 끈적하면서도 답답한 느낌이라면 문경의 공기는 청량한 사이다와 같았다.
"오빠는 영화 좋아해요?" 기석은 영화라고는 TV나 영화채널 등에서 보여주는 정도 외에 본 기억이 없었다. 딱히 좋아하는 장르도 많지가 않았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 그냥 보여주면 보는 거고 안 봐도 상관이 없고. 문경에는 극장도 아마 없을걸."
"아 그렇구나. 전 디즈니 영화 마니아예요."
"디즈니? 뭐 만화 같은 거 말하는 거야?"
"만화라뇨. 얼마나 잘 만드는데요. 그리고 마블사도 디즈니에 들어가 있어요."
"마블사? 그게 뭐야?"
"마블을 모르다니. 아이언맨, 블랙 위도우, 토르, 스파이더맨 등등이 모두 마블사의 캐릭터예요."
"아~ 그렇구나. 영화 속에서 본 적은 있어."
그녀는 어릴 때부터 영화를 보면서 만족을 하면서 살았다. 특히 디즈니 속의 캐릭터들을 많이 좋아했었다.
"난 그중에서 메리다 공주가 한 말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우리의 운명은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을 들여다볼 용기가 있다면 말이다.' 정말 멋있지 않아요?"
기석은 운명이나 용기 같은 것을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보면 볼수록 특이해 보였다. 반찬 만드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지만 자신만의 생각이 또렷하게 있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