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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Nov 19. 2023

노량: 사람 이영남

죽음의 바다에서 이순신과 함께 명을 다하다.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해인 1592년 조선 최대의 수군 기지인 경상 우수영을 담당하는 경상 우도 수군절도사에 원균이 임명이 된다. 그 원균의 휘하에는 선조 17년(1584)에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 훈련원참정도총부 경력을 거쳐 율포만호로 임명된 이영남이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7살이었다. 원균은 거제 현령 시절에 보여준 무능함이 빌미가 되어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가 파직된 지 1년이 지난 후였다. 원균이 경상우수사가 된 지 3개월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영남은 1563년 진천군 덕산면 가전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묻힌 곳은 진천군이다. 선산인 갈현산에 고이 묻은 것은 그를 수행한 하인 일학이었다.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충무사에 가면 이영남과 이순신의 위패와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다.

이영남 장군이 묻힌 곳에 오면 특이한 나무가 하나 있다. 오래간만에 보는 연리목이다. 연리지나 연리근은 많이 보았지만 다른 수종의 나무가 함께 얽힌 연리목은 오래간만에 본다.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몸통이 합쳐져 마치 한 나무가 된 것을 연리목이라고 하는데 두 남녀의 지극한 사랑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영남은 생전에 가장 닮고 싶어 했던 사람이 이순신이었다고 한다. 

수군이 되어 원균 휘하에서 첫 전쟁을 치렀지만 왜군에게 패배를 하였다. 이에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구원병을 청하였던 사람이 이영남이었다. 이영남 장군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최후를 마쳤을 때 함께 순국한 10여 명의 장수 중에서 가장 먼저 이름이 오른 인물로 당시 직위는 가리포첨사(종 4품)였다.

이후 이영남은 이순신의 휘하에서 소비포권관으로 옥포, 당포, 당항포, 한산대첩 등 10여 차례의 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을 보좌하면서 전과를 올리게 된다. 해전에서 승승장구하던 이영남은 1595년에 태안군수 강계부판관 장흥부를 잠시 지내고 다시 1597년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과 함께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곳은 이영남 장군의 묘다. 이영남은 이순신 장군이 조선수군 7000여 명, 명나라수군 5000여 명으로 조명연합수군 연합함대를 편성하고 훈련에 들어갔을 때 항해에 익숙한 완도 장정들을 고금지에 모아서 훈련하고 수군을 정비하였다. 

그날이 마지막 날이 될지는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조용하게 빠져나가려는 왜군들의 앞을 막기 위한 이순신의 행보에 이영남도 같이 출정하였다. 

왜군은 어떻게든 수군을 피해서 안전하게 본국으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함대를 막고 있었던 것은 조선해군이었다. 이영남 장군의 사당은 충용사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연리목은 그들의 인연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1598년 11월 19일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의 싸움은 예전과 같지가 않았다. 일본군도 목숨을 걸었고 이를 막기 위한 이순신의 의지도 상당했다. 

같은 배에 타고 누구보다도 앞에서 서서 싸웠던 이순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영남은 앞에 서서 왜군과 싸우다가 칼날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노량해전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갑옷을 죽어가는 부하에게 덮어주었던 이순신은 왜군 조총의 유탄에 맞아 쓰러지게 된다.  

그렇게 무관으로 조선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이영남은 노량해전으로 3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영남 장군은 사후에 선무원종공신 일등 병조판서로 높여주었으며 그의 묘 옆에 있는 연리목처럼 이순신과 함께 노량해전 죽음의 바다속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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