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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맹 씨 행단

자신만의 얼굴을 만들어가는 일을 생각하다.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가는 일은 항상 새로운 일이다. 계절이 변화하는 것처럼 순산순간 새롭게 피어나고 꽃처럼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새로움이라는 매력이 생긴다.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은 사람마다 다른 색깔과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때론 공통적인 면을 발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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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 씨 행단은 말 그대로 맹 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으로 맹고불의 고택, 구괴정, 쌍행수 등을 망라하여 "맹 씨 행단"이라 부르는 곳이다. 맹사성(孟思誠)은 1360년(공민왕 9년) 7월 17일 수문 전제학 맹희도의 맏아들로 온양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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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기회와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청렴하고 깨끗함을 유지하며 스스로를 지킨 것을 청백리(淸白吏)라고 부르고 있다. 청백리에 대비되는 용어는 뇌물을 받은 관리를 뜻하는 장리(贓吏)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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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 고택이 자리한 맹 씨 행단에서는 선비 맹사성의 풍류라고 해서 2024년 5월 11일 하루에 두 차례에 걸쳐 프로그램이 운영이 된다. 맹사성의 이야기보따리, 맹사성, 흑우 색칠하기, 구괴정에서 시조 짓기, 활쏘기 체험, 국악 크로스오버 공연 등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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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뇌물을 받은 관리와 후손은 대대로 과거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하는 등 조선시대에는 무엇보다 관리들의 도덕성과 청렴성을 강조했다. 맹사성(孟思誠:1360~1438)은 황희, 허조, 유관 등과 함께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청백리 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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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은 고려말인 1386년(우왕 12) 27세의 나이로 관직에 진출하여, 세종 때인 1435년 관직에서 물러나기까지 약 50년간 관료 생활을 했다. 저 앞에 보이는 건물은 고려말 최영장군의 고택이었다가 후에 손녀사위인 맹사성이 살았던 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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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이 자리한 곳의 바로 앞에는 은행나무 단이 있어서 맹 씨 행단(孟氏杏壇)으로 불린다. 고택 뒤에는 맹사성과 부친 맹희도, 조부 맹유를 모신 사당인 세덕사(世德祠)가 있으며, 고택 뒤편 언덕에는 맹사성이 황희, 허형과 함께 각각 세 그루 느티나무를 심은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는 정자인 구괴정(九槐亭)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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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은 청백리이고 악기를 좋아하고 소박하며 진솔한 인품을 가졌다는 내용 외에 다른 내용이 많지는 않지만 세종은 맹사성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사서 중용하였다. 한 번뿐인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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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오면 맹 씨 행단을 찾아가서 돌아보면 너무 좋은 시간을 선사해 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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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살림집으로는 가장 오래된 집으로 사료 가치가 높은 맹 씨 행단의 고택은 시대가 변하면서 여러 번 고쳐지었다고 한다. 최영장군으로 말하면 칼의 힘으로 살았던 사람이고 맹사성은 붓의 힘으로 살았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강한 사람은 칼의 예기와 붓의 부드러움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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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고택이 처음 지었을 때 맹 씨 행단에는 온돌이 설치되지 않았고, 1482년 좌향을 바꾸면서 온돌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탁 트인 공간에 작은 집이 자리하고 있지만 가장 큰 나무가 심어져 있다. 타인을 위해 나무를 심는 사람의 마음처럼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정치가가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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