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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닿은 건 풍경

순교의 갈매못성지, 낚시의 오천항, 풍경의 충청수영성, 숫자 61

여행에 연습이 필요할까. 여행에 정답이 있을까. 연습도 정답도 필요 없는 것이 여행이지만 자주 떠날수록 자신과의 관계는 좋아지게 된다. 자신이 원래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혹은 자신에 대한 신뢰를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과정을 거치면 작은 것에도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다. 예전에는 그런 달력이 있었다. 1년 365일이라고 해서 매일 한 장씩 뜯는 달력 말이다. 달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문득 어딘가에서 좋은 풍경이 들어가 있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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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못순교성지는 서해랑길 보령 61코스에 속해 있는 구간이다. 61코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면서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말에게 물을 먹이던 갈매못에서 처형당한 다섯 명의 믿음이 있었던 순교지 갈매못성지는 천주교의 성지로는 유일하게 바닷가를 보는 위치에 조성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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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도들의 탄압은 조선의 개국시기와도 연결이 되어 있다. 일본과 달리 조선은 적절한 시기에 개국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 시기는 천주교도 박해시기와도 맞물려 있다.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는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병인박해가 마무리되었고, 1886년 조선과 프랑스의 국교 수립으로 천주교 포교가 공식으로 승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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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의 바다로 이어지는 길인 서해랑길에서 보령 61코스를 모두 걷지 않고 이곳 갈매못순교성지에서 키조개 혹은 바다낚시로 잘 알려진 오천항을 거쳐서 조선시대에 축조된 석성인 충청수영성까지만 걸어봐도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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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다.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교황의 이야기가 전 세계에 전해졌다. 정말로 좋은 말은 진실이 아닐 때가 많다. 진실된 말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굳이 필요하지 않은 말은 하지 않으며 회복력이 있는 필요한 말이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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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오천항은 무엇보다도 키조개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있는 맛집중 마음에 드는 곳도 몇 집이 있다. 오천항 키조개는 종패를 뿌리지 않는 자연산으로 키조개 관자, 날개살, 꼭지살을 버섯, 미나리, 양파, 대파 위에 올리고 양념장으로 맛을 낸 오천항 키조개 두루치기도 맛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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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으로 인해 통제영하면 남해를 생각하지만 서쪽을 방어하던 곳으로 보령의 수영이 있었다. 조선시대 지역마다 수군 지휘부인 수군절도사영으로 부산 수영, 경남 통영, 전남 여수에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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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영성은 위쪽에서 내려오는 길과 아래쪽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때로는 아래에서 올라가는 것이 좋을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위에서 내려오면서 바다를 조망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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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025 보령 국가유산야행이 오천면 충청수영성 일원에서 진행되었다. 토정 이지함이 충청수영성에서 길을 묻다는 주제로 열렸는데 올해는 왜 이지함이었을까. 토정 이지함의 집안은 좋았지만 마치 아웃사이더처럼 돌아다녔던 사람이다.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점쳐주고 상담을 해주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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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이지함의 묘가 보령에 있기 때문에 보령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거론이 되곤 한다. 탁 트인 바다처럼 탄탄대로를 갈 수도 있었지만 토정 이지함은 그런 길을 걷지 않았다. 그의 성품은 호방하고 따뜻했으며 자신이 나아가야 될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를 알았기에 화를 피했다. 그래서 이지함은 앞날을 예건하는 능력으로 잘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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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이지함이 세상의 이치를 잘 알았다기보다는 잘 살폈던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라는 명칭이 청홍도로 바뀐 것은 역모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충주라는 중심도시의 양반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충주는 유신현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충주의 충은 지명 앞에 사용되지 못했다. 이지함은 그 변화를 미리 알고 충주에서 바로 보령으로 내려왔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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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이지함도 수없이 갈매못이 있던 곳에서 오천항과 충청수영성이 있던 곳까지 오가곤 했을 것이다. 이지함에게 남은 것은 보령바다의 풍경이었으며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던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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