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아침 일찍 등교하고 저녁 늦게 들어오는, 우리 집에서 가장 바쁜 셋째와 모처럼 데이트를 나갔다. 피부관리와 메이크업에 대한 꿈을 가지고 하교 후 학원으로 발을 들인 지 6개월이 지났다. 피부미용에 대한 진로에 대해 어떤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던 나와 남편은 우리만의 판단에만 머물러 있다 보니 인문계열 교과 과정 외에는 그 중요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창 학교 과정을 공부할 시기에 어려워하는 과목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피부미용 관련 학원에 다니면서 동시에 두 가지를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먼저 들었다. 진로를 선택하여 대학에 간 후에 자격증 과정을 밟아가며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수능이며 내신 준비를 고등학생 때인 지금 파고들어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오히려 두 마리 토끼를 다 쫓다가 한 마리도 잡을 수 없게 될까 봐 걱정만 앞섰다.
친구들 중에는 중학교 시절부터 진로를 미리 정한 후 준비하는 아이들도 많다고 했다. 이전보다 달라진 입시 준비에 사뭇 놀라며 이런 아이들 틈에서 과연 고2의 1학기 절반 이상을 보내고 처음 시작하게 되는 일들을 잘 가지고 갈 수 있을지에 대해 또 다른 걱정만 가득하다. 아이가 하고자 하는 앞길을 부모라는 이유로 더디게 하거나 막게 되는 것은 아닌지 미안한 마음도 들기도 했다. 아이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진로를 정했고 지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준비해서 대학을 가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음대나 미대처럼 실기 과정을 미리 준비해서 포트폴리오도 만들어 놓고 자격증 준비 등 할 수 있는 부분을 조금씩 준비할 모양이다. 자신의 확고한 꿈을 이야기하는 아이를 그저 믿어주고 밀어줄 수밖에 없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명언처럼 한번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방향대로 흘러가도록 옆에서 지켜주고 보아 가면 되리라.
학교 중간고사와 병행하며 피부관리 필기와 실기시험 준비, 웨딩 메이크업 대회 준비까지 해야 하는 딸아이의 고군분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바쁘고 힘들기까지 하다. 자신의 꿈을 위해 견디어야 할 날들은 눈앞에 놓인 징검다리처럼 아득히 멀게 놓여만 간다. 하나씩 견디며 넘어가야 하는 징검다리 수만큼 해내야 할 일들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다. 타인의 말과 격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귀하게 믿어가야 할 것은 바로 자신뿐이다.
자신의 꿈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기까지, 뿌연 안개를 헤집어 맑은 하늘을 만나기까지 누구든지 숱한 반복과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 세상은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없고 그 이상의 고통과 시련을 맛보아야 한다. 무슨 일이든 숙련된 모습을 보이기까지는 더불어 해내겠다는 용기, 주저해도 다시 일어나 걸어가는 과정을 숱하게 부여잡아야 한다. 결국의 빛남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빛남이 아니라 자신만의 별을 하나씩 채워가는 일일 것이다.
중간고사는 끝이 났고 학교며 학원으로 달려 나간 애씀에 쉼도 필요하기에 함께 외출한 날의 가을 하늘은 유난히 푸르게 다가온다. 쾌청한 날만큼이나 불어오는 바람의 향기는 낙엽이 되어 귀퉁이를 ‘빙’ 돌아 나온다. 평소 도서관 인문학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어 살며시 엿보던 차에 이 가을의 운치와 너무 어울리는 첼로 콘서트가 열렸다. 오랜만에 딸과 손을 잡고 찾아가는 그 길이 낭만으로 흐른다. 십 대인 아이한테는 엄마의 행동이 유치하겠지만 지금의 가을을 즐기는 나로서는 온 세상의 빛깔이 너무 예뻐 가는 내내 호들갑을 떤다. 도서관을 향하는 내내 재잘대며 나무의 색감에 감탄을 쏟아내는 사이 아이도 기분이 좋은지 플라타너스 빛깔에 ‘폭’ 빠져 풍성함을 자아낸다. 좋아하는 음악을 세게 틀어놓고 스트레스가 풀리는지 자꾸만 크게 따라 부른다.
도서관 대강당 무대에는 1인 좌석과 테이블, 마이크가 놓여 있다. 파란 하늘빛을 배경으로 ‘꿈은 나를 일으킨다’라는 글자가 도드라지게 우리를 맞이한다. 고등학생이라 뒷자리를 선호할 줄 알았는데 ‘앞으로 가서 보자’라는 나의 권유에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냉큼 앞자리에 앉는다. 음악과 함께 나눌 이야기를 품은 콘서트에 딸과 함께 오게 되어 기뻤다. 황금 같은 주말에 엄마가 좋아하는 장소로 함께 와 준 딸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성지송 첼리스트의 공연은 말 그대로 벅찬 감동의 여운이었다. 어린 시절 첼로를 시작하여 예술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가기까지 오로지 한눈팔지 않고 한 길만 걸어온 분이다. 오랜 시간의 연습과 꿈이 이룬 지난날을 함께 회상하기 시작한다. 그저 첼로가 좋아 시작한 일이 전공이 되기까지 몇만 번의 울림을 억겁으로 만들고 또 쏟아내었을까? 무거운 첼로와 한 몸이 되어 비비고 튕겨낸 수만큼 음악은 잔잔히, 또 고요하게 흐른다. 고요한 선율은 첼로의 몸짓만큼 낮고 묵직한 목소리를 낸다. 손가락이 활처럼 흐르는 대로, 활은 파도처럼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며 가슴으로 파고든다. 연주하는 내내 압도된 표정까지 숨죽이게 한다. 관객과 음악이 하나가 되어 만나는 조화로운 순간이다. 음악의 선율을 따라가는 내내 솜이불을 덮듯 마음이 포근하고 평온해진다. 아스라이 멀어지듯 당겨오는 클래식의 선율은 역시 예술이었고, 자주 듣던 드라마와 영화 음악, 가곡에 이르기까지 사이사이 가을의 절정은 첼로와 함께 여유 있게 달리기 시작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내로라하는 음대에서 공부하던 첼리스트에게 하루아침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기게 되고 쌓아 온 지난날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여느 때처럼 첼로를 뒷좌석에 싣고 가던 날 크게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이로 인해 우측 팔 전체의 신경이 손상되어 다시는 첼로를 연주할 수 없게 되었다. 빛을 비추던 햇살에 어둠만이 드리워지고 우울감으로 압도된 시절을 보내게 된다. 오랜 기간 투병하며 재활을 반복하던 차에 절실했던 엄마의 간호 덕분으로 다시 새로운 치료를 시작하고 가까스로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첼로를 연주하기는 무리였다.
유학을 준비하던 한창의 시기에 아름다운 아가씨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방에만 틀어박힌 딸을 볼 수 없던 엄마는 이야기한다. 네가 좋아하는 다른 일을 해보라는 진심 어린 격려가 통했는지 자신이 만든 음식을 누군가 맛있게 먹는 모습이 행복해서 요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친구들은 유학에,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기도 하는데 나름의 자괴감은 없었을까? 좋아하던 일을 접고 다른 일을 해야 했던 그 마음은 과연 어땠을지 마음이 너무 아프다. 요리학원에 다니며 자격증을 따고 나서 난생처음 레스토랑 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안 해본 일이 없이 닥치는 대로 하기 시작했다. 레스토랑 사장님 권유로 칵테일 제조사가 되어 칵테일 만드는 재미에 빠진다. 손님들과 이야기하며 그날의 시름을 덜어내 힘을 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새롭게 다시 비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도전 앞에 무너지지 않는 마음들은 어떻게 쥐고 모았을지 그만 마음이 뭉클해진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지만 무언가 텅 빈 마음은 하염없이 내리게 되고 다시 마주하게 된 첼로에 가슴이 뛰게 된다. 이분한테는 멀리 돌고 돌아도 결국 첼로가 그런 것이구나! 다시 돌아가더라도 현실과 맞닥뜨린 고통과 언제든 맞서야 한다. 내 것이 되기까지 전념해야 하는 시간은 끝을 알 수 없이 멀기만 하다. 그 접점의 시간은 오래도록 꾸준함으로 이어져야 한다. 마치 점이 선처럼 이어지기까지 그 안에 수많은 나의 별을 숱하게 넣어가야만 한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시련은 차라리 동기가 된다. 내가 그것에 있고 마음을 다잡아 가는 만큼 반드시 방법은 생겨난다. 어떤 일이 나에게 오기까지 꿈은 결코 멀리 있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멀리 있게만 느껴질 뿐이다. 첼리스트는 여전히 또 다른 부작용인 심한 어깨통증으로 연주할 때마다 고생하고 있지만, 첼로를 연주하여 들려줄 때마다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힘을 얻는다. 그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녀의 마음은 음악 안으로 깊게 드리워진다. 그 마음은 사랑이다.
연주와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아낸 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곧 인생을 향해 나아갈 꿈이라는 것이다. 방향을 모르지만 꿈이 있기에 언제든 나아갈 수 있다. 첼리스트의 말처럼 히말라야산맥을 등반하는 사람은 산악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산악인을 안내하는 셰르파의 이야기처럼 정상으로 가기까지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는 사람들. 기존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열어가야만 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같은 직업, 직종은 존재하지만 누구나 그 일이 처음이기에 그것은 새로움이다.
꿈을 향해 가는 앞길이 비록 낭떠러지에 가시덤불이더라도 한 발 한 발 내딛는 순간이 쌓여 그 길은 나의 길이 된다. 멀리 돌아가더라도, 바로 앞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도 그러기에 인생은 더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 될 테니까 말이다. 어려움을 극복하며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순간 뒤쪽은 두려움이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앞쪽은 용기를 거머쥔 희망의 물살로 내내 흐를 뿐이다. 때론 물속에 빠지고 흙탕물을 만나더라도 내 꿈을 향해 일단 즐기며 나아가는 거다.
첼로 연주를 듣는 내내 뭉클거리는 마음 따라 딸의 얼굴도 내 눈에 안겨 들어온다. 꿈을 가진 한 사람의 인생 하나를 나만의 생각으로 쉽게 판단하고 가벼이 보고 지나치지 않도록 소중하게 안아간다. 첼로의 깊은 소리만큼 오래도록 묻어갈 가을의 소리는 꿈이다. 그 꿈은 보이지 않는 촘촘한 다그침에서 얻어진 틈으로 자신만의 가슴으로 말갛게 떠오를 가을의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