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주 치열한 삶들은 만나곤 한다. 일상의 일들이 곧 치열한 삶이기에 그 삶은 의미가 있다. 누구의 삶이 더 멋지고 누구의 삶이 더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소명 아래 묵묵히 해내는 하루가 곧 치열함이다. 치열하다는 것은 빽빽하게 들어선 빌딩과 흡사하다. 숲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모습도 치열함이다. 책에서 읽었던 것처럼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이룬 치열함은 곧 삶이다. 조용하고 한적하기만 하던 숲은 실로 대단한 치열함이 이룬 공간이다. 무수히 많은 나고 자람이 있고 온갖 생명체를 품어 낸다. 가지 끝으로 바람을 부르고 새를 만나간다. 품어 내는 향기는 그 안을 비추는 쾌청한 공기가 된다. 짓밟히고 꺾이고 강렬한 해와 심통 난 비바람에 이기고 서서 이룬 것들이 곧 지금을 만들어 간다. 남편 친구의 비보를 들은 후 나는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 앞에, 누구라도 익숙지 않은 사실 앞에 멈춰질 수밖에 없었다. 나고 자라고 행하고 떠나는 것에서의 한 사람의 공간은 치열함을 이루지만 그 치얄함은 과연 이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되는 것일까. 마치 운명 앞에 무릎 꿇고 순응할 수밖에 없는, 아니 순응할 수조차 없는 커다란 무게 앞에 남겨지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생각지도 않은 일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은 그 자체가 뜻을 품지 않았기에 더없이 슬프다. 친구의 비보를 들은 남편의 마음은 어떤 소용돌이 안에 빙빙 갇혀 휘도는 종이 한 장처럼 정처 없이 휘몰아친 슬픔으로 가누지 못할 그리움을 안아간다. 그 옛날 코흘리개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추억을 떠올리며 치열하고 또 치열하게 북받쳐 오르는 감정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 않을까. 순서가 없는 죽음 앞에 무던히도 놓였던 삶이 안타까운 이유는 ‘준비’라는 두 글자가 주변에 놓여 있지 않아서이다.
전화를 받고 나서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연거푸 물어 받아들일 때까지 내 안의 감정들은 무수히 흔들린다. 가족의 가족, 친구의 친구, 이웃의 이웃, 사회적 관계의 관계를 모두 아울러 지금이라는 때에 한 사람을 떠올린다는 것으로 모두는 안타까움과 아픔을 대신하고 있다. 죽음에 순서는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이 피부로 와닿은 것은 바로 우리가 그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은 태고부터 존재하였지만 마치 나와 무관하게 함께 공존해 가는 공개된 비밀과도 같다. 과연 지금에 죽음을 떠올리며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죽음을 알게 되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준비할 기회가 있다는 것이 행운이지 않을까.
모두의 탄생도 축하할 일이지만 내가 이 세상을 살다 떠났을 때 ‘잘 놀다 간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지금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일지 생각해 본다. 정답은 없지만, 각자의 일들은 모두 가치가 있다. 지금이라는 현실 앞에 치열하게 놓인 것들은 그렇기에 내가 되어 가는 순간을 만들기에 더없이 소중하기만 하다. 현실의 무게에 눌려 이리저리 떠밀리고 한탄하고 부정하고 억압이라 느끼기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하는 일 하나하나에 굳이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그저 좋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찡그리기보다 웃어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하며 노을 진 하늘을 보낼 수 있다는 것, 바쁜 일상을 뒤로하고 터벅터벅 걸어 들어와 끈끈하게 안아줄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
24시간 안의 언저리를 하나하나 나누어 보면 소소한 기쁨과 행복으로 마주할 일들은 의외로 많다. 이것을 보아 가는 것이 곧 내 앞에 놓인 미래가 알 수 없기에 막막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보아 가고 느낄 수 있기에 곧 새로움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다.
지금이라는 때에 이르러 내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의 마음을 품어본다. 나를 사랑하는 일들은 나의 몸과 마음을 아끼는 일이고, 치열하게 쏟아낸 삶은 누군가에게 나눌 힘을 만드는 것이다. 탄생의 순간부터 이룬 치열함은 곧 내 삶의 성장 과정이다. 그 속에서 무너지고 쓰러지며 다시 일어나서 안아갈 일들은 오히려 지금과 만나 가장 좋은 때를 이룬다. 지금이라는 때에 이르러 삶은 결국 감사로 이루어져 간다.
반짝 떠오른 해에 풀잎은 이슬을 받아 싱그럽게 여문다. 은행이 노란빛을 품어 내고 단풍나무는 새색시가 마냥 붉기만 하다. 온통의 가을이 11월의 바람처럼 스산하나 따뜻한 마음으로 겨울을 준비한다. 내어줌과 받아들임을 적당히 할 수 있는 온기가 거기에 있다.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를 나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이라는 때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그저 기쁘다. ‘떠나면 이 좋은 것들을 못하겠지’ 아쉬움보다 누군가에게 잘 남겨진 나의 이야기는 오늘도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