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간호사회에서 실시하는 직원역량 강화교육에 참여하게 되었다. 업무를 마치고 강연장으로 향하는 마음은 무언가 기대감에 사로잡힌 아이의 설렘처럼 일상을 재미있게 뒤흔든다. TV 프로그램에서 보던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김경일 교수님의 강연을 직접 들을 기회였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저서 중 ‘마음의 지혜’라는 책을 먼저 읽고 좋은 마음을 가져간 기억 덕분인지 무엇보다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책 하나로 친숙한 기분이 드는 것은 이 책을 읽었을 당시에 공감 가는 글귀들이 주는 힘 덕분인 것 같다. '마음의 지혜'는 나로 인해 내가 기준으로 삼아야 할 삶의 지혜가 무엇인지 알려준 책이었다. 일상에서 가져갈 행복은 미처 내가 이룰 수 없는 높고, 거창한 것은 아니었기에 더 와닿았던 건지도 모른다. 강연 후 사인을 받겠다는 작은 소망을 안고 책을 챙겨 들고, 동료 간호사와 ‘룰루랄라’ 신나게 강연장으로 향했다.
오가는 10월의 가을은 깊게 흐른다. 바람은 쉼 없이 한들거리며 나무 사이로 시원한 입김을 내뿜는다. 햇살은 지난여름의 혹독한 시련을 '푹' 내려놓고 다분히 얌전해진 빛깔로 나무마다 내려앉아 있다. 강연장으로 향하는 내내 비추는 가을빛을 보니 ‘심쿵’ 마음이 내려앉는다. 세상이 예쁘게도 흐른다. 일상에서 다른 장소를 찾아가거나 접하는 것은 익숙함을 벗어난 새로움이 된다. 더욱이 나를 위한 긍정의 시간을 주는 순간부터 누구보다 나를 돋보이게 하는 것만 같아 그렇게 가을날이 예뻐 보일 수가 없다.
일찍 도착하여 여유 있게 주차를 하고 강연장 앞쪽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가지고 온 '마음의 지혜'를 가방에서 꺼냈다. 책을 펼치자 형광펜으로 그어 놓은 문장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독서를 할 때면 때론 감탄으로, 때론 주옥같은 문장들에 멈춰 설 때가 많다. 쉽게 떠나지 못하는 문장들 앞에 눈을 뗄 수 없어 진하게 칠해 놓는다. 혹여 잊어버릴까 봐 되내는 문장들은 형광펜 사이에서 다시 한번 살아난다. 책 구절을 따라 읽고 쓰고, 그것에 대한 내 생각을 기록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책을 대하며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문장들은 그날의 쉼이 된다. 어떤 날은 두 번, 또 어떤 날은 연거푸 마주하는 문장들의 합은 점점 커진다. 그만큼 내 마음도 둥글게 퍼져 간다. 내가 쉬어가는 휴식 중 단연코 1위는 하루 30분 간의 읽어 내려감과 함께 쓰고 다지고 그려진 생각들을 버무려 보는 책과의 소통이다.
어느 날 밤 아들이 자러 들어가면서 부엌 식탁 위에서 책을 읽고 필사를 하는 나에게 물은 적이 있다.
“엄마, 엄마는 일 끝나고 집안 일로 바쁜 틈에도 책 읽고 글 쓰는 게 대단해요. 누워서 쉬고 싶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꾸준히 할 수 있는지 궁금해요.”
“응, 엄마는 이게 쉬는 거야. 좋은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많이 읽지 않아도 하루가 마무리되는 느낌이 들어. 그게 너무 좋단다. 엄마는.”
아들이 엄지손을 치켜세운다. 그 칭찬이 기분 좋은 울림이 된다. 꾸준한 일상이 나를 이루고 있기에 칭찬받는 나에게도, 칭찬해 주는 아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당당한 시너지를 만들어 준다.
30분간의 독서는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날마다 꾸준하게 해내는 것은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습관의 힘은 무섭다. 무언가 읽고 다시 쓰는 행위가 하루 24시간 안에 일부로 당당히 자리 잡았으니 말이다. 그것이 내가 행하는 행복의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시간이 쌓여가는 만큼 조금씩 이어지는 하루하루가 나를 위해 향하고 있음을 느낀다. 타인의 집중이 아닌 나를 위한 집중이 이 시간만큼은 존재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김경일 교수님이 강연장으로 들어오니 어느새 채워진 강연장의 열기가 뜨거워진다. 푸근한 인상으로 무대에 오른 김경일 교수의 모습이 꼭 동네 아저씨 같아서 반가웠다. 환호와 박수가 하나로 모아진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업무를 마치거나 쉬는 날 시간을 내어 이곳에 모였다. 각자의 참여 이유는 다르겠지만 이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의미로 채워질 마음들이 궁금해진다.
간호사 업무를 하면서 여러 관계에서의 어려움과 혹독함을 여러 차례 맛보아야 하는 우리로서는 오늘 주제를 따라가는 ‘한국 간호사의 행복과 회복탄력성’을 어떻게 풀어 줄지 궁금하여 두 눈 크게 뜨고 따라잡기 시작했다. 심리학 중에서도 인지심리학을 교육하는 분으로 대부분 현상에 대한 심리적 척도를 수치화, 통계화하여 연구하는 것들이 많았다. 특히 행복을 숫자로 표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물론 개인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우리는 앞으로 저출산 시대에 맞추어 80세까지 일을 해야 하고 그만큼의 감정을 소모하게 된다. 그만큼의 일을 하려면 몸도 건강해야 하지만 마음의 건강도 중요하다. 책에서도 나온 이야기이지만 여러 연구를 통해 나온 것에서 한 가지 사실은 알게 된다.
바로 행복과 만족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라는 것이다. 1년에 100점짜리 행복 1번보다 10점짜리 10번의 행복이 자신에게는 더 효과적이라고 한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한국 사회의 한국 사람들의 특징을 여러 사례로 알려주는 것에서 너도나도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웃음 자체로 공감대가 형성된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많이 일어나는 한국 사회는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욕의 가짓수가 많고 걸핏하면 화를 주체하지 못해 나오는 대표적인 말 중에 해외에서는 번역조차 되지 않은 말이 있다고 한다. 드라마에서도 흔히 나오는 대사 중 하나는 “너, 내가 누군지 알아?”이다.
행복은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도구다.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살기 위해 행복해야 한다. 특히 행복을 빈도로 느끼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일상을 잘 이어나갈 확률이 높기도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아가게 된다.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처럼 소소한 일상을 매일 기록하는 것이다. 확률적으로는 5%의 사람들만이 기록을 한다고 한다. 실마리를 남기는 것은 나이 역사에 남기는 일이다. 그 기록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나를 알게 된다. 95% 사람들은 기록을 하지 않기에 시간이 지나면 그날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기억해 낼 수 없는 망각의 길을 걷게 된다.
난중일기는 우리가 알고 있던 것처럼 정자에 앉아 ‘한산섬 달 밝은 밤에......’를 읊조리고, ‘소인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처럼 훌륭하고 거룩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일상에서 두드러지게 작성된 것은 누구와 음식을 먹은 일, 부하와 백성이 속상하게 한 일, 누구와 수다를 밤새 떤 일, 업무 과로로 인한 마음 상태, 아무 생각 없이 걷는 이야기, 원균의 험담였다고 한다. 기록을 통해 좋은 일, 나쁜 일을 모두 적어 내려가 마음을 다스리고 결국 다시 출근하여 일하는 장군의 일상을 엿본다. 그 시대에도 같은 하루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떤 마음들을 내가 가져가야 할지 알게 된다.
누구나 우리는 같은 일상을 통해 고통과 시련을 가져갈 수밖에 없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기억하는 훌륭함과 강인함 뒤에는 바로 기록을 하여 남겨지는 것들로 인해서이다. 기록을 통해 궂은일을 다시 좋은 감정으로 다스릴 기회를 주는 것이며 작은 일에도 감사함과 소중함을 느끼는 것이다. 결국 가까이에 존재하는 일상을 통한 소소한 행복의 빈도 차이였다. 기준을 구태여 높게 잡을 필요도, 너무 세세하게 조각내어 잡을 필요도 없다.
누군가 만나 맛있는 음식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산책을 통해 이 계절을 느끼는 것, 가족과 재미있는 시간을 느끼는 것, 좋아하는 장소에서 지내보는 것, 아이와 함께 웃어가는 것 등을 통해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 기록을 하는 나의 행복은 오늘이기에 계속된다.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하늘에 걸린 노을이 예쁘다. 차곡차곡 쌓인 가을처럼 타는 하늘이 깊어지는 10월이다. 환경은 내가 바꿀 수 없지만, 환경에 대한 내 생각과 행동은 바로 내가 선택할 수 있기에 행복이라는 기준을 잘 잡아가 본다.
행복은 바로 내 옆에 있음을 느낀다. 풀 한 포기 한들한들 살랑이는 바람을 마주하는 것도, 붉어지는 낙엽 사이 온화한 빛깔을 보아감도, 푸른 하늘 청명함처럼 기분 좋게 걸어갈 수 있다는 것도 모두 행복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모락모락 구워지는 뜨끈한 붕어빵 한 봉지 사서 들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