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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두 번째

파도가 없다면

by 현정아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 한정원의 8월, (주)난다 -시의적절 시리즈



파도가 없다면 이 세상 생명은 살아갈 수 있을까? 끌어당김과 밀어냄의 법칙이 자연스레 존재하는 곳으로부터 바람은 존재한다. 거기에 파도가 매달린다. 바람과 파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가 보다. 가까이인 듯하나 먼 것처럼, 붙어가다 떼어내듯, 잔잔하나 거침없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파도는 바람이다.


파도가 있기에 바람이 오고 바람이 있기에 파도가 흘러간다.

사람 사이 파도의 깊이에 인생의 애환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울고 웃고 슬프고 행복할 수 있다.

서로의 존재는 이 세상이 생겨난 후 시작된 할머니의 할머니의 그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이어진 지 오래다. 파도는 훨씬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우리 살기 훨씬 이전부터 삶을 지켜낸. 결국 우리도 파도처럼 주어진 대로, 오며 가며 들어졌다가 놓았다가, 때론 가벼이 또 때론 거침없이 그렇게 삶을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파도가 없다면 바다를 미처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처럼은 못했을 것이다.

파도는 바람으로 새기는 것,
희구로 생기는 것,
들고일어나는 마음 없이는 없을 것.
썰물과 밀물 사이에서 보낸 한 해 한 해가 조개의 몸에 둥근 선으로 남는다.
그 선은 나무의 나이테가 그러하듯 나이를 보여준다.


조개의 선

나무의 나이테

손의 주름

얼굴에 파인 주름

쭈글 해진 피부

성장과 닳음

탄생과 죽음

자라남과 꺾어짐

시행착오와 성숙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세월이 주는 약속


우주가 내린 섭리대로

주름이 새겨진 골짜기는 파도로 인해, 바람에 의해

그렇게 우리는 익어가는 세월을 맛보고 있다.


주름을 사랑해야지

나의 시간을 인정해야지

늙어감을 칭찬해야지

버티고 상장한 시절을 잊지 말아야지


파도가 없다면 주름도 없을 것

팽팽하면 오히려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주름이 없다면 사이마다 놓여진 적당의 온도, 평정심을 우리는 결코 안을 수 없다.


희생과 안정


그것은 깊은 주름의 인내만큼 새겨진 우리네 기록이다.


밝은 선과 어두운 선이 번갈아 나타나는데 밝은 선은 조개가 성장하는 시기에,
어두운 선은 성장을 멈추는 시기에 그어진다고 한다.
몸의 기록은 역시 솔직하다.
주름은 골짜기가 있다는 뜻
숨긴 부분이 있다는 뜻
비밀은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있다.
인간도 나무도 여우도,
계절도 밤도 언어도,
선악도 병도 죽음도,
해명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구석을 지닌다.

밝은 비밀,
어두운 비밀,
밝은 비밀,
어두운 비밀,

환희거나 상처거나가 새긴 실어의 선
나는 그것을 평생토록 궁금해하겠지만 함부로 캐지는 않을 것이라고,
홀로 명멸하는 등대를 바라보듯 멀리서 오래 보살필 것이라도 다짐하므로.


여름은 파도를 부른다. 마치 이리 오라 손짓하듯.

파도는 우주의 힘을 따른다. 마치 그대로를 받아들여 주어지는 대로.

바람이 부르는 언덕은 모래가 된다.


하늘 비를 새긴 파도의 언어.

태양의 내리쬠은 작열하고,

습한 대지 곳곳을 있는 대로 적시려 드는 여름은

그대로의 여름.


가는 방향대로, 흘러가는 대로

멈추고 찢기고 넘어지고 상처 나도 다시 꿋꿋해지는 마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새겨가는 주름이다.


씨앗을 통해 싹이 터서 크게 성장해, 나아가는 시기는 여름.


이 여름의 주어짐처럼

바다의 향기를 이고,

썰물과 밀물을 이루는 새로운 시작이

날마다

가득 찼다 빠지는 물빛을 이루고


채워졌다 밀려나는 세월의 기록을 시절마다 품어

그렇게 적어 내려가는 파도라는 인생을 타고 간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 주름을 이고 파도를 따라.

삶은 파도의 이야기를 닮았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를 오래도록 사랑해야지.


늙어가는데 주름이 져야지요.
없애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기쁘게 살았다는 증거이고,
눈빛이고,
어떤 비밀이고,
파도인데요.
파도가 없다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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