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이르는 길
모래알 만한 진실이라도-박완서 에세이
<사랑의 행로>
유난히 선선한 바람, 드높은 하늘의 빛깔이 밝고 푸르다. 가을로 다가온 9월의 하늘이 어느새 여름을 살며시 밀어내고 있다. 선함의 9월이 열정으로 다한 인내를 살포시 안아간다. 익어가는 계절의 빛남이 조금씩 세상천지를 물들인다. 조금 있으면 노란 은행잎을 볼 수 있겠지. 붉은 단풍이 사력을 다해 지금의 시절을 물들이겠지.
시간은 흐르지만 시간 안에 멈추어지는 것들이 있다. 그 옛날의 기억, 어린 시절의 꿈과 미래를 향한 희망. 가장 힘들다는 지금을 살아낸 증거가 여기에서 기록된다. 생각이라는 이어짐으로. 맑은 하늘 아래 구름이 포근하다. 그 포근함을 따라 나도 나이가 들어간다. 내가 따라가는 나이만큼 사랑의 행보는 기억되고 나누어진다. 그렇게 믿고 싶다.
손자와 함께 맡는 민들레꽃 내음은 참으로 좋았다.
그 조그만 게 피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뿌리내린 흙의 저 깊은 속살의 꿋꿋함과
그 조그만 것까지 골고루 사랑한 봄바람의 어질고 부드러운 마음까지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p.147
나도 민들레꽃을 좋아한다. 돌무더기, 담벼락, 지붕 위, 거리의 보도블록 미세한 틈 사이를 뚫고 오른다. 거친 땅의 메마름 위에서도 곧잘 피어난다. 작고 노란 꽃 무리가 태양을 그대로 품어내 밝아온다. 봄이 하늘을 향해 미소 짓는다. 강한 생활력이 따스하게 비친다. 덩달아 따뜻해지는 마음이다.
민들레는 스스로 애써 갈구하지 않지만 절대로 꺾이지 않는 소신을 피워낸다. 누구에게 쉽게 현혹되거나 흔들리지 않을 정신이 한 떨기 꽃에 모두 들어 있다. 땅을 이고 자라난 노란빛은 순수하고 아름답지만, 누구보다 강한 빛이다. 봄이 시작되었음을, 다시 태어남이라는 시작을, 그리고 다시 남기어 가는 것들을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뿌린다.
약한 것이 가장 강한 것이기에 봄이면 그 꽃을 닮아가려 한다. 내가 사는 세상의 가장 귀한 땅으로부터의 인내를 겨울 동안 심어낸 보람이다. 작고 여리지만 가장 강한 시작 앞에 박수를 보낸다. 매년의 봄이 기다려지는 것은 같은 꽃이라서가 아니라 새로이 시작되는 한 시절, 그만한 계절의 가장 귀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가장 좋은 때이다.
보답이란 뭘까?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p. 148
이런 고달픈 사랑의 행로 끝에 도달한, 책임도 없고 그 대신 보답의 기대도 없는
무던하기를 사랑의 경지는 노후의 축복인가. p.148
고달픈 사랑 앞에 무기력하지 말기를. 누구에게 책임을 씌우거나 보답을 받지 말기를. 내 자식이라 해서 내 것으로 여기지 말기를. 그저 세상을 향해 하 걸음 나아갈 소중한 존재임을 바라봐 주기를. 고달픈 행로는 고달픈 것이 아니라 바라지 않은 사랑 앞에 흔들리지 않은 무언의 내어줌이라 여겨진다. 내가 하는 사랑이 결코 빗나가지 않기를 , 부담스럽지 않기를. 책임이라는 존속으로 덧씌워질 체인이 되지 않기를. 나도 나로 인해 사랑이 살아나기를.
큰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 하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p.151
커서 만일 부자가 되더라도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수준에 자기 생활을 조화시킬 양식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부자가 못 되더라도 검소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되 인색하지는 않기를. 아는 것이 많되 아는 것이 코 끝에 걸려 있지 않고 내부에 안정되어 있기를. 무던하기를, 멋쟁이이기를. p.151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있을까? 나는 인생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행동하고 있을까? 사랑이라는 믿음이 오히려 내 삶의 존귀를 무너뜨리지는 않을까? 누구나 귀한 사람이라는 존재를 타고났지만 스스로에게 귀한 사람이 되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내가 행하는 생각이, 행위가 나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어떤 방식으로 어떤 무늬를 찍어내고 있을까?
자식에게 바라기 전 나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함을 느낀다. 모두 이룰 수 없지만 최소한 내게 부끄럽지 않을 하루를 만들어 내리라 다짐하면서. 오늘의 독서는 참으로 달고 쓰다. 그 사랑이 나로 인해 타인으로, 타인으로부터 나에게로 번져가는 고마운 생각을 하기까지 반성과 공감을 맛보며.
감사함이라는 단어에는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내가 행하는 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그로 인해 내가 받는 무한의 영광은 실로 소중하다. 나로부터 이어진 사랑의 마음. 그것은 종이 한 장 차이에서 나오니 나부터 진정의 마음을 품어 보련다. 글을 읽고 쓰는 이 시간이 귀한 것처럼 내가 행하는 일들이 가볍지 않도록 멋진 하루를 엮어 가련다. 내일 다시 시작되는 일들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내가 행할 수 있는 최소와 최대의 주어짐이다.
마치 우리의 인생행로에 요행보다는 불의의 재난이,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운 날보다는 쓸쓸한 날이 더 많듯이. p.162
그 최초의 인식이야말로 자연과의 교감이 시작이 아니었을까.
달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걸 알고부터는 내가 쓸쓸할 때는 달도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기쁠 때는 달도 기쁜 알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p.163
어쩌면 행복보다 슬픔이, 기쁨보다 눈물이, 환희보다 걱정이 더 많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복은 사소함에서 나온다.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생각을 품고 가는지가 중요하다. 내 의지가 향하는 일들에 나와 연결된 무언의 움직임이 우주의 섭리처럼 순화되어 나온다.
돌고 도는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무서운 것일까? 어쩌면 나와의 일들이 가장 무서운 약속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달은 기울었다 차고 아침이면 태양이 떠오른다. 비었다 채워져 가는 달처럼 하루의 에너지가 향하는 일들 역시 없어졌다가 채워진다. 시작되는 영광이 아침의 태양 안에 고스란히 놓인다. 달이 있기에 소망을 이야기하고 헌신하며 태양이 있기에 새로이 시작할 용기를 지닌다.
비워냄과 채워감의 사이에 놓인 일들 안에서 무수한 기도로 응답하는 달처럼 꿋꿋하게 살아가는 일상이 행복임을. 지켜내는 누군가의 존재는 결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저 좋을 뿐이다. 내가 나로 인해 우뚝 서기를, 그로 인해 내 사랑이 태양처럼 번져가기를 소망해 본다. 가장 행복한 날들이 여전히 흐르고 있기에 가까이의 작은 일들을 고마운 마음으로 가져가 본다. 사랑의 일들. 나의 사람들. 나와 이루는 나의 모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