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정신과약 대리처방받기
캐나다에 온 지 3달째, 정신과약이 똑 떨어지고 말았다. 사실 똑 떨어진 건 거짓말이고 조금 남아있긴 했지만, 어쨌든 아껴먹지 않으면 간당간당한 상태인 건 맞았다. 근데 매일 먹어야 하는 정신과약을 아껴먹는다는 게 말이 되나?
말은 안 되는데 어쨌든 그렇게 먹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니까.
나는 중증 우울증을 앓고 있었기에, 이 문제는 캐나다에 오기 전부터 줄곧 화두였다. J 정신과 선생님도 내가 약을 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최대한 내가 캐나다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처방할 수 있는 최대치인 2개월치의 약과 영문 처방전과 영문 소견서를 내게 들려 비행기에 태웠다. 그런데 웬걸,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은 탓에 허구한 날 약을 까먹으며 그렇게 2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바쁘긴 했지. 캐나다 직장도 구해야 했고, 직장에 적응도 해야 했고, 책도 읽어야 했고, 글도 써야 했고, 카페 탐방도 가야 했고, 한국 취업도 준비해야 했고, 박싱데이(Boxing Day)에 세일하는 가게를 찾아온 밴쿠버를 돌아다니며 쇼핑도 해야 했고, 집에 와서는 혼자 위스키도 마셔야 했다. 바쁘긴 했지. 그런데 문제는 캐나다 BC주에서 의료 서비스를 받으려면 적어도 몇 달이 걸리는 서비스인 MSP(Medical Services Plan)를 약이 똑 떨어져 가는 시점에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정신과약은 떨어져 가는데, MSP 신청 결과는 세월아 네월아 언제 나올지 모르고, 당장 내일 출근해서 또 손님들에게 웃음을 팔아야 하는데, 내가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곧장 한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연락을 했다.
어머니는 좀 귀찮은 눈치였다. 하기사 서른 하나 먹은 아들이 전화해서 “서울에서 정신과약 좀 대리처방받아서 우체국에 간 다음 태평양 건너 캐나다로 보내달라”는데, 생각보다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병원에 연락해서 대리처방 서비스를 물어보고, 병원은 나에게 연락해서 대리처방 서명서를 받고, 어머니가 서울에 가서 처방을 받은 뒤에, 정신과약을 각종 서류들과 꽁꽁 포장해서, 우체국에 간 다음 국제운송으로 부쳐야 했으니까. 차라리 돈 부탁이 더 간단했을 텐데.
어쨌든 어머니는 좀 귀찮은 눈치였지만 위에 열거한 모든 일을 참아내 주시고 약을 보내주셨다. 병원에 방문해서 약을 받고, 우체국에 가서 약을 보내고, 운송장과 EMS번호를 내게 알려주셨다. 그렇게 해서 한국으로부터 약 5일 만에 새로 2달치의 약을 얻게 되었다. 이틀에 한번, 삼일에 한번 꼴로 약을 줄여가던 나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약을 얻은 지금은 MSP 신청은 되던가, 말던가 다. 어차피 2달 지나면 약이 또 떨어질 텐데 왜 이렇게 태연 작약하냐고? 약을 다 먹어갈 때쯤인 5월에 한 번 한국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때 최대치의 약을 한 번 더 타서 캐나다에 가져간 다음, 또 약을 다 먹어갈 때쯤인 8월 말에 한국에 돌아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 뜨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