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아 인로, 김엘리, 오미영 옮김(2015). 《군사주의는 어떻게 패션이 되었을까》, 바다출판사.
남잔 좋겠다, 여자 많아서. 여잔 힘들어, 남자 많아서.
이 글은 나의 페미니스트적 자아가 발휘될 예정이다. 이 말인즉슨 내가 하는 글이 누군가에겐 너무 과해서 문제가 될 수도 있고("이건 페미다!"), 누군가에겐 오히려 부족해서 문제가 될 수도 있다("이게 페미냐!"). 그러니까 어느 쪽으로 보나 불만족스러운데, 그럼에도 이 주제는 페미니스트 유머를 기반으로 해야만 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어쨌든 남자들은 남성혐오라고 느낄 수도 있는데, 그렇긴 하다. 이 글은 알파 메일에 대한 베타 메일의 증오와 넋두리일까? 상남자에 대한 하남자의 떨리는 두 주먹일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동시에 이 이야기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그리고 물론 이 글을 읽을 남성이 상남자일 가능성도 극히 낮다, 안 그런가?).
질문은 이것이다: 왜 틴더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운동은 할 줄 알아도 옷을 입을 줄은 모르는 걸까? 그러니까, 그들의 사진을 보자면 스쿼트와 데드 리프트는 할 줄 알아도 옷을 제대로 입는 법은 모르는 것 같다. 성난 두 개의 찌찌와 눈을 마주친 것에 대해 나의 친구들은 불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친구와 여느 때처럼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가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 너는 남자라서 좋겠다, 여자 많아서.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싱긋 웃으며 받아쳤더랬다: 너는 여자라서 힘들겠다, 남자 많아서. 이건 오래된 농담, 틴더를 사용하며 서로가 느껴왔던 이질감과 괴리감을 이용한 농담이었다.
나는 이성애자니까 틴더 프로필에도 항상 여성만을 소개받도록 설정해 두었다. 친구는 아마 남성을 소개받도록 설정해 둔 모양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우리는 서로가 모르는 이야기들을 알고 있었다. 젠더가 두 개로 나뉜 세상에서 다른 젠더가 속한 공간은 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남과 여로 나뉜 공중화장실이나 목욕탕처럼.
왜 이렇게 벗은 남자들이 많은지, 왜 그런 남자들은 다들 ONS(One Night Stand), FWB(Friends With Benefits)를 프로필에 걸어두는지 모르겠다며 한탄하는 친구의 얘기를 나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나도 종종 여성을 소개받다가 비슷한 단어들을 본 적도 있고 노골적으로 성관계를 암시하거나 주장하는 소개글을 본 적도 있었다. 그리고 대개는 그런 여성들도 속옷만 입고 나머지는 벗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유독 등장 빈도수에서 경험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많아?" "굉장히 많아."
물론 그들이 HPV 예방 검사지나 성병 검사지를 올려놓는 건 그래도 바람직하지 않으냐(나)라는 주장과 그 정도로 상대방과 자고 싶다는 것 같아서 께름칙하다는 주장이 맞붙기는 했으나, 어쨌든 남성들의 성적 어필을 훨씬 많이 한다는 주장에는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었다. "내가 여자들 소개받을 땐 다들 언어교환이나 동네친구 얘기하던데?", "남자들 소개받을 땐 안 그래. 다 자고 싶어 하지." 물론 이것은 내가 '자고 싶은 남자 목록' 하위에 머무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수도 있다.
실제로 만나고서도 경험적인 차이가 생긴다. 내가 주로 그들을 만나 좋은 시간 혹은 즐거운 경험을 얻었다면, 친구는 다양할 정도로 불쾌한 경험이 주를 이루었다. 그중 하나는 형사고소가 진행되고 있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상대에 대한 온갖 쌍욕으로 친구를 격려했다.
또 다른 친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여성들은 틴더 하다가 좋은 꼴을 못 보는 건가? 하지만 그 책임이란 게 있다면, 그건 여성이 아니라 그들과 제대로 상호작용할 수 없는 남성에게 있을 것이다. 만나자마자 이 사람을 어떻게 모텔이나 자취방으로 데려갈지, 어떻게 한 번 자볼 수 있을지, 언제부터 사귀자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사람에게 어떤 대화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것에 대한 경험적 연구가 있다면 읽어보고 싶다. 궁금하다. 어쨌든 나와 나의 친구들에 한정된 경험이지만, 왜 남성에게는 틴더가 그렇게 쾌적한 공간인데 반해 여성에게는 그렇지 못한가? 그러니까, "남자는 좋겠다, 여자 많아서. 여자는 힘들어, 남자 많아서"같은 이야기에 깔깔 웃을 수 있는 분위기가 탄생하게 된 토양에 대해 질문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은 그게 누구든 다른 인간을 성적으로 볼 수 있다. 틴더 프로필에 올라온 사진의 어떤 점을 섹시하게 볼 수도 있고, 실제로 만났을 때에도 '이 사람, 침대에서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의 질문이 섹시한 것에 비해 '이 침대, 사람에게는 어떨까?'라는 질문은 인체공학적으로 들리는 것처럼, 입장을 뒤바꾸었을 때 낯설게 느껴지는 점이 분명 있다. 인간은 그게 누구든 다른 인간을 성적으로 볼 수 있지만, 어째서 한쪽 성은 다른 쪽 성을 오로지 성적으로'만' 보는가? 왜 한쪽 성은 오로지 프로필의 사진만을 보고 무분별하게 좋아요를 누르는 반면, 왜 다른 쪽 성은 사진과 소개글, 연동된 SNS와 실물인증여부를 살피는가? 그리고 이렇게 비대칭적인 욕망의 대립 속에서 왜 나는 긍정적인 경험을, 왜 내 친구들은 그렇지 못한 경험을 훨씬 더 많이 경험하는가?
페미니스트적 호기심이라는 말이 있다(신시아 인로. 《군사주의는 어떻게 패션이 되었을까》, 2015, 바다출판사). 자연스러워 보이는 어떤 상황의 자연스러워 보이는 어떤 전제를 페미니스트적으로 다시 질문해 보고 다시 생각해 보는 호기심이 그것이다. 남자는 성욕이 많고 여성은 성욕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는 이미 500년도 더 유행이 지난 이야기다. 문제는 대체 뭐가 남성만이 성욕을 갖는 것처럼 만들고, 여성은 성욕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느냐를 질문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틴더에서 너무 나간 걸까? 고작 데이팅 애플리케이션인데? 하지만 친밀성과 연애와 섹슈얼리티가 교차하는 이 가상의 공간은 내가 남성으로서 욕망을 느끼고 동시에 남페미로서 흥미를 느끼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단순하고 낡은 농담 하나에도 나는 죽자고 달려드는 것이다, 그만큼 내 관심을 끄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