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500 Days of Summer, 2009). 조셉 고든 레빗(Joseph Gordon-Levitt)과 주이 디샤넬(Zooey Deschanel)(씨네21)
이성애규범성을 놓지 못하는 남페미는 틴더창을 넘기고
틴더에서 알게 된 친구가 있다. 벌써 몇 년째 우정을 이어온 그와 나는 서로의 별의별 연애사를 안주 삼아 이야기를 나누어왔다. 그러던 그가 내게 꾸준히 하는 소리 중에 '여미새'라는 말이 있다. '여자에 *친 *끼'라는 말은 어감도 그렇고 내용도 그래서 나는 화난 눈초리를 쏘았지만, 입은 얼어붙었는데, 그의 농담이 틀린 말은커녕 바른말이라 그랬다. 젠장.
이성애는 나에게 있어 최대 화두다. 언제나 그래왔고, 언제나 그럴 것이다. 그도 그럴게 내가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한 것은 대체 왜 나는 이성애 없이 살 수 없는가에 대한 나의 질문을 페미니즘이 처음 답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건 네가 이성애자 남성이라 그렇단다"하고 말하며 페미니즘은 나의 비뚤어진 인셀(Incel) 같은 심보를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주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나는 이성애자 시스젠더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지극히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가 곧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성애를 비판하고 상대화할 언어는 얻었는데, 내가 그 규범 속에서 자유롭다 못해 그 규범을 사랑해마지 않는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배우던 초창기에는 아무리 공부를 하고, 화장을 하고, 크로스 드레싱을 해보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지나서 내가 알게 된 건 내가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이성애규범적 남성의 자리에 매우 큰 안정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해도 나는 전형적인 모노아모리(monoamori)가 좋고, 전형적인 이성애 로맨스가 좋아. 아무리 페미니즘 논문을 열심히 읽어도, 틴더를 스와이프하며 연애 상대를 찾고, 아무리 퀴어 이론을 열심히 독파해도, <오만과 편견>을 읽으며 다아시와 베넷이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런 고민을 가진 내게 가장 큰 울림을 준 작품은 바로 영화 <500일의 썸머>(500 Days of Summer, 2009)다. 가장 좋아서도 아니고 가장 감동적이어서도 아니다. 바로 이 영화가 이성애자 시스젠더(cisgender) 남성으로서 나에게 주는 거울치료(Mirror therapy) 같아서다. 썸머를 향한 톰의 마음을 여러 연출을 통해 보다 보면 정말 어쩔 줄을 모르겠다. 내가 이성애 한 번 잘해보겠답시고 저질렀던 온갖 일들이 머릿속에 플래시백으로 튀어 오르기 때문이다. 그래놓고 자기 자신은 로맨티시스트라고 굳건히 믿는 꼴이라니, '이래서 이성애 하는 시스젠더 남성들이 제일 문제다'싶은 것이다. 상대에 대해 오해하고, 지배하고, 통제하고, 그것을 로맨스로 포용하는 거, 진짜 구제불능이다.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계속 시도했던 것 중 하나는 나의 이성애규범성(heteronormativity), 남성성, 페미니즘을 화해시키는 일이었다. 어떻게 셋이서 잘 합의를 보면 좋겠는데 그게 참 안된다. 록산 게이(Roxane Gay)가 《나쁜 페미니스트》(원제: Bad Feminist, 2014)라는 책을 쓴 지도 햇수로 벌써 10년 가까이 되어가고, 나도 읽어봤지만, 어쩐지 내 이성애규범성과 남성성은 페미니즘은 매일매일 치고받고 싸운다. 이 때문에, 페미니즘을 배우고 갈고닦은 것치고 내가 얻은 능력이란 정말 한 줌이긴 한데, 그중의 대다수가 자의식이다. 자기 객관화도 아니고 자의식 과잉이 내가 이 신념을 지키며 가장 많이 얻어낸 부산물이다.
어떻게 셋이서 잘 합의를 봐야 내 인생계획도 일관되게 가져갈 수 있을 텐데, 한쪽에서 남성성과 이성애규범성은 안정적인 가부장 남성을 외치고 있고, 다른 쪽에서 페미니즘은 내 인생계획에 혁명을 외치고 있으니, 정작 내 인생을 끌어가는 나는 될 대로 돼라 싶다. 지금까지 잘 왔으니 앞으로도 어떻게든 되겠지. 어쨌든 페미니즘을 계속 공부한다면 이성애를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 누구에게도 좋지 못했던 예전 같은 실수들을 줄일 수는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