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의 욕설을 가을바람에 털어내며
"추석 연휴를 마치고 오면 더위가 거의 물러갈 테니 그때 에어컨을 꺼도 되지 않을까요? 그때까지는 에어컨을 가동합시다."
며칠 전 나는 행정실장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고 분명히 추석 연휴 직전까지는 에어컨을 켜두기로 했었다. 10월 첫날 오늘은 기온이 여전히 높고 습하기까지 한데 교장실 에어컨 조절기를 눌러도 꿈쩍 안 하는 폼이 약속보다 일찍 냉방을 중단한 듯했다.
오늘은 교감선생님이 출장으로 자리를 비웠고, 학교의 큰 행사인 진학설명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서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3학년 교실복도를 지나갈 때였다. 한 여학생이 내가 지나가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들으라는 듯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씨발, 학교에서 에어컨도 안 켜주고."
나는 순간 움찔하면서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 학생을 불러 지도하려다가 그냥 못 들은 척 지나쳐 와 버렸다. 저 욕이 교장인 나를 향한다고 여기면 이 더운 아침에 내 마음이 너무 괴로울 것 같았다. 그저 더운 날씨에 어린 학생이 짜증이 나니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날씨에 대한 감탄사' 정도로 갈음하기로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행정실로 내려가 행정실장에게 학생의 욕을 그대로 전했다. "일전에 추석 전까지 에어컨을 켜두자고 했는데 조금 빨리 끄셨네요."라고 하니, 행정실장은 끄는 시점을 착각했다며 에어컨 전원을 서둘러 올렸다.
1교시 시작 전에 실내에는 시원한 바람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침에 나를 힐끗 보면서 십 원짜리 욕설을 내뱉었던 그 학생의 불만도 이제는 사라졌을까. 우리 학교가 워낙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등굣길에 땀깨나 흘렸을 테니, 교장이 옆에 있든 말든 원망 섞인 말이 나올 수도 있었겠다고 다시 한번 내 마음을 다독여본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여느 때처럼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행정실장과 아침에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운동장 한쪽에는 올여름 불볕더위를 무사히 견뎌낸 배롱나무가 마르고 지친 꽃잎들을 떨굴 태세였다. 백일 동안 꽃을 피운다는 백일홍, 제 할 일을 다 하고 떠나는 그 뒷모습이 대견했다.
그 곁에는 잎도 없이 붉은 꽃부터 쑤욱 밀어 올린 꽃무릇이 강렬한 색을 뽐내고 있었다. 꽃과 잎이 평생 만나지 못해 '상사화'라고도 불린다고 했었다. 거미를 닮은 그 화려함 뒤에 독성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가 묘하게 마음을 끌었다. 그 옆으로는 멕시코가 고향이라는 노랑 코스모스들이 흐드러지게 깔려 가을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나는 운동장에 여러 번 나왔다. 오후가 되니 한층 시원해진 가을바람이 반갑기도 했고, 학생의 거친 말에 상처 입은 마음을 바람에 털어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선생님들에게 학교 화단에 피는 꽃이라도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을까.
나의 40여 년 교직 생활, 학생들의 철없는 말과 행동에 가슴에는 이미 구멍이 숭숭 났다. 늙은 교장의 이 허허로운 마음을 채워주는 건, 철 따라 여지없이 피어나는 꽃들의 예쁜 위로다.
"교장 선생님, 이제 들어가시죠."
꽃들이 건네는 인사를 뒤로하고 다시 교장실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슴의 구멍으로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지나간다. 다시 아이들을 마주할 힘을 얻는, 10월의 첫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