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빛 카네이션 뒤에 가려진 생의 무게

외동딸이자 외며느리, 그리고 할머니로 사는 예순의 어버이날

by 해림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오후에 큰사위에게서 카톡이 왔다. “어머니, 언제 퇴근하시나요?”

그 시각 나는 학교에서 조퇴하고 나와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몇 주 전부터 시작된 허리 통증이 어깨까지 번져, 마치 등짝에 커다란 돌덩이를 얹어놓은 듯했다. 도저히 일에 집중할 수 없어 찾은 병원엔 어깨 아픈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 시간 반을 기다려 겨우 만난 이는 의사가 아닌 간호사였다. 의사도 아니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꼬치꼬치 증상을 묻는 그녀를 보며, 아픈 몸 탓인지 사소한 일에도 신경질이 치밀었다.


마침내 나타난 의사는 사진을 찍어보자더니, 목 디스크가 의심되니 목 전문 의사를 따로 만나라고 한다. 또다시 기다림 끝에 만난 목 전문 의사는 MRI를 찍어보자고 하더니, 그나마도 오늘은 안 된단다. 나이가 든 걸까. 예전 같으면 주변 분위기를 봐서 고분고분 넘겼을 일들에 자꾸 노여움이 생겨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고등학교 화학 선생님의 예언 같은 말씀이 떠올랐다. "너희가 어른이 되면 오른쪽 눈깔과 왼쪽 눈깔을 따로 진료받는 세상이 올 거다." 정말 그 말대로 어깨 따로, 목 따로다. 팔꿈치와 손목까지 찌릿한 이 몸을 온전히 고치려면 대체 몇 명의 의사를 더 만나야 하는 걸까.


통증을 억누르며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카네이션 바구니를 든 손녀와 딸 부부가 등장했다. "이게 누구 거니?" 물으니 손녀는 "할머니, 할아버지 꽃이에요!"라고 외친다. 작은 꽃바구니 하나에 병원에서 쌓인 짜증이 씻은 듯 사라졌다. 우리 부부는 약간 오버하게 보일 정도로 좋다는 표현을 했다. 조부모가 명심해야 할 의무이다.


한참을 놀던 손녀는 목욕까지 하고 갔다. 나는 바지를 걷어 올리고 목욕탕 바닥 의자에 앉아 손녀의 수발을 들었다. 그런데 아이가 내 다리를 씻어주겠다고 나선다. 샴푸를 짜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종아리를 문지르고 물을 끼얹어준다. 다리에 남은 상처 흔적을 보더니 "할머니 아야도 안 아프게 해 줄게"라며 속삭인다. 아이가 평소에 안 하던 특별한 행동을 마치 어버날 행사용으로 사전 계획하고 왔다는 듯이 연출을 해냈다. 사실은 이게 비눗물을 만지작거리는 놀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앙증맞은 손길이 닿을 때마다 어버이날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효도를 받는 기분이 들어 가슴이 벅찼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내가 쪼그랑 할머니가 되었을 때, 이 아이는 내 손이라도 한 번이라도 씻어줄까. 문득 구순의 친정어머니가 떠올랐다.


얼마 전, 보행기를 밀고 무단횡단을 하다 경찰에게 제지당한 엄마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떼를 쓰며 소변 실수까지 하셨다. 집으로 모셔온 어머니는 처방전 이상으로 과다하게 복용한 약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나는 어머니를 목욕탕에 앉혀드리고는 물만 받아놓은 채 그대로 나와버렸다. 오늘은 몸이 안 좋으시니 외출하시지 말라는 나의 부탁도 요양보호사의 만류도 뿌리치고, 약에 취해 노랗게 변한 얼굴로 기어이 나가서 사고를 치는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엄마의 몸을 직접 씻겨드리는 수고를 더 이상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늘 걱정만 안겨주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는 어머니 앞에서, 예순이 넘은 나는 자꾸만 거리감을 느낀다. 저런 어머니가 한없이 불쌍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어머니보다 심장이 나쁜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과 분노가 한 번씩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요즘은 내가 살기 위해 이렇게 이기적인 자기 방어의 벽을 전보다 자주 세우고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자'고 다짐하면서 차갑게 식어버리는 내 마음을 애써 다독이기도 한다.


최근 홀로 지내시던 86세의 시어머니는 스스로 요양병원 행을 택하셨다. 다섯 명의 딸이 있어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어머니의 노년.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는 말이 뼈저리게 다가온다. 외동딸이자 외며느리로서 두 노인을 바라보는 심정은 늘 복잡한 타래처럼 엉켜있다.


오늘 어버이날, 손녀에게 서프라이즈 효도를 받는 할머니인 내가, 동시에 누군가의 딸이자 며느리로서 요양병원에서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시어머니와 늘 위태롭지만 대책이 안 서는 노모의 뒷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소란해진다. 핑크빛 카네이션 뒤편에 가려진, 이 서글프고도 무거운 생의 고리들을 어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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