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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Nov 20. 2020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21세기 한국 정치를 뒤흔든 드라마, 노무현 대통령 탄핵과 기각

21세기에 접어든지도 20년이 흘렀다. 이 시기 한국 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드라마틱한 격변과 충돌을 겪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극단적으로 다른 배경과 성향의 정치 지도자 두 명이 존재한다. 정치 역사상 처음으로 강렬한 팬덤 현상을 일으켰고, 재임 기간 중 국회에서 탄핵이 가결된 비운의 전직 대통령, 노무현과 박근혜다.


우리와 같은 대통령 중심제 국가인 미국이 정부 수립 후 230년 동안 단 한 번도 대통령 탄핵 사례가 없었건만, 공화국 수립 70년이 갓 지난 한국은 두 차례나 국회에서 탄핵이 가결되었고, 결국 그중 한 번은 헌법재판소의 인용 판결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는 격동의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상고를 졸업하고 인권변호사를 거쳐 국회의원과 대통령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노무현. 초등학생 시절부터 부친을 따라 청와대 생활을 하고 부모 모두 총에 맞아 죽는 슬픔을 딛고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부녀 대통령으로 기록된 얼음공주 박근혜.


나는 파란만장한 우리 정치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인 노무현과 박근혜의 대통령 탄핵 사건을 중심으로 21세기 한국 정치의 극적인 명암을 되새기고자 한다. 이와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 나의 소소한 활동과 경험도 가미하여, 거시의 국가사와 미시의 개인사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 로그온 하다"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자 영국 가디언지가 보도한 기사 제목이다. '노사모'라는 열성적인 팬클럽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한 참여정치의 구현을 표방한 노무현 정권의 출범은 한국 사회 주류세력의 세대와 이념이 교체하는 시대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지역과 이념 어느 곳에서도 탄탄한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고 어떤 정책을 추진하든 기득세력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 참여정부의 현실이었다. 따라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신당을 창당하고 총선 승리를 기원하며, "대통령이 뭘 잘해서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라고 언론 기자회견에서 말했는데 이것이 결국 탄핵사유가 되었다.


2004년 3월 12일 국회는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탄핵의 변곡점이 된 이 발언과 태도를 보노라면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의 기질을 뚜렷이 확인하게 된다. 얼마든지 에둘러 말할 수 있고, 겉으로는 중립을 지키면서 은밀하게 지원해도 되련만, 노무현은 결코 그러지 않았다. 후에 그는 탄핵 사태와 관련하여, 자신의 소신을 버리고 부당한 요구에 적당히 타협하고 사과할 수는 없었다고 밝혔다.


이후의 전개 상황은 역사가 증명한다. "대통령이 사과 정도 하면 될 일을, 비리로 얼룩지고 곧 임기가 끝나는 국회의원들이 무슨 자격으로 탄핵하느냐"는 국민들의 분노가 전국 각지에서 촛불시위로 번져갔다. 유권자들의 심판은 냉정했다. 2004년 4월 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152석으로 과반을 넘긴 반면, 한나라당은 121석에 그치면서 참패를 했다.


국회의 탄핵안 가결 직후, "탄핵 반대, 민주 수호"를 외치는 시민들의 촛불 함성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지 2달여 만인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청구를 기각하는 결정을 내린다. "대통령의 법 위반 행위가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없고, 파면 결정을 정당화하는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장의 판결문이 낭독되었다. 이로써 대통령 권한이 정지되었던 노무현은 제1당이 된 열린우리당과 함께 책임 있는 국정운영이 가능하게 되었다.


역사는 돌고 돈다. 노무현 탄핵안 표결 당시 활짝 웃으며 '가'라고 쓰인 용지를 모두 볼 수 있게 펼쳐서 투표함에 넣었던 박근혜는 12년 뒤 정작 본인이 탄핵당하고 대통령직에서 파면된다. 국회 법사위원장 자격으로 탄핵 소추위원을 대표했던 김기춘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의 직권남용죄로 징역형이 확정되었다. 네팔 여행 중 황급히 돌아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심판 대리인단 간사를 맡았던 문재인은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2004년 상반기에 나는 TV 총선보도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선거일 기준 한 달 이내의 뉴스 보도를 대상으로 분석했던 기존 연구에서 탈피하여, 선거를 3~4개월 앞둔 시점부터 기간별 평가기준을 설정하고 장기적, 심층적, 종합적인 분석을 시도했다. 2000년 4.13 총선보도와의 비교도 실시했다.


그런데 선거보도 분석 도중에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나는 선거 초기-탄핵정국-공식 선거기간으로 구분하여 TV 뉴스 보도를 분석했다. 탄핵정국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탄핵의 사유와 정당성을 심층 분석한 보도가 매우 적었다. 둘째, 탄핵 직후 여론조사 결과와 유사한 비율의 인터뷰로 시민 목소리를 담아냈다. 셋째, 탄핵의 논거와 파급효과 등에서 방송사별로 다양성과 차별성이 존재했다.   


문제는 총선 이후 한국언론학회가 TV 탄핵보도 분석 보고서를 내면서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해도 공정했다고 말하기 어렵다"라고 주장했고, 이를 조선, 중앙, 동아 등 보수신문들이 1면에 대서특필하면서 다시 불거졌다. 총선 참패의 빌미를 찾던 한나라당은 방송의 편파적인 탄핵보도 때문에 선거에서 졌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KBS와 MBC는 내 보고서를 근거로 내세우면서 보수신문의 공격에 맞섰다. 논란이 확산되자 나는 언론학회 보고서와 나의 분석 보고서를 비교하며 "탄핵보도 공정성 문제의 생산적 논의를 위하여"라는 기고문을 <미디어오늘>에 게재했다. 특히 영국 BBC의 '정당한 불편부당성(due impartiality)' 개념을 인용하여, 이는 기계적 균형성이 아니라 여론의 흐름에 무게를 두어 책임 있게 보도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퇴임 후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내려간 노무현 대통령. 이제 그곳에는 그의 묘와 비석만이 남아있다.


노무현은 대통령 퇴임 이후 고향인 봉하마을에서 손녀와 자전거를 타고 논두렁을 달리며 평화롭게 여생을 보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정치검찰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여기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고 심지어 왜곡 과장하여 보도한 언론도 적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이승철과 장필순이 애절한 목소리로 부르는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들으며 먹먹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검찰과 언론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를 놓고 첨예한 갈등을 벌이고 있다. 선출되지 않은 무소불위의 권력집단, 검찰과 언론을 과연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할지 구체적인 논의가 절박한 시점이다. 더 이상의 소중한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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