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에세이/ 니콜라스 파티 <나무 기둥>, <버섯이 있는 초상>
사진 찍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하얗게 빛나는 구름을 눈으로만 담기 아쉬웠던지 내 동행자는 셔터를 멈추지 않았다. 이를 보던 우크라이나 친구 카트리나가 웃었다. 우리는 오후가 되면 호수의 풍경을 돌며 산책했다. 수영복을 입거나 가벼운 셔츠를 걸친 사람들이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금발머리를 묶은 채 호수가를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명랑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나라 우크라이나는 현재 전쟁 중이다. 나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위치한 홀로도모르 기념공원에도 갔다. 이곳은 소련 시대의 강제 집단농장화와 대기근을 기리기 위한 장소였다. 당시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소련에 의해 굶어 죽은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될 만큼 잔인했다.
오랜만이다. 그녀는 활기가 없어 보였다. 오랜만이라 인사하니 몸도 마음도 아팠다고 한다. 1980년 광주에서 비상계엄을 경험했었노라, 친구들도 동네 사람들도 잡혀가고 죽어가던 것을 직접 보았노라, 이번 윤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사건으로 대체 일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즉각 철회되었지만 과거의 기억은 잠시나마 그녀를 흔들어 놓았다. 전쟁 경험이 없는 나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이라지만 잘 모른다. 뉴스 보도와 사진을 통해 전쟁을 듣고 보지만 솔직히 모른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 그 예쁜 아이들의 안부가 궁금할 뿐이다.
스위스 작가 니콜라스 파티의 벽화 ‘나무 기둥’이다. 나무가 불에 탄 것인지 분노한 것인지 붉다. 붉은 것도 아니다. 빨갛다. 핏빛이다. 가시처럼 돋은 가지들만 앙상한 나무들은 온통 핏빛이다. ‘버섯이 있는 초상’과 병치되어 있다. 버섯으로 뒤덮여있는 사람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죽었니, 살았니?’ 툭, 치고 도망쳐도 따라올 것 같지 않다.
어느 시대도 혼란스럽지 않을 때가 없었을 것이다. 신의 창조 이래 6,000년 역사는 인간 타락과 동시에 끔찍하고 절망적이지 않을 때가 없었다. 파티의 핏빛 나무들은 그 역사를 온전히 경험하여 아픔과 슬픔, 비참함과 끔찍함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 역사 앞에 사람이 버섯을 품고 있다. 머리에는 세 마리의 나비가 그려져 있다.
버섯은 부패과정이나 분해자가 활발한 환경에서 자란다. 예를 들면 떨어지거나 죽은 나무, 썩은 동물, 부패한 식물과 잔해가 있는 땅, 축축한 습지, 동물의 배설물이 분해된 곳은 오히려 버섯이 자라기에 적합한 환경이다. 절망적인 상황 앞에 사람이 버섯을 품고 있다.
나비는 성체로 변태 하는 과정까지 변화와 성장, 그리고 또 다른 시작을 상징한다. 자유와 희망, 영혼, 죽음, 환생이라는 의미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 나비가 사람의 머리에서 날고 있다.
핏빛 나무와 버섯 그리고 나비 사이에 사람이 나는 보인다.
작가는 우울한 현실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그럼에도’ 희망을 말하고 싶었을까. 폐허와 핏빛의 풍경을 결국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은 인간이다. 우리를 실망시키고 절망케 하는 것은 인간, 나 자신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창조의 이상을 이뤄야 하는 것도 인간밖에는 없다.
처음 마주한 파티의 그림은 색으로부터 강렬했다. 직관적으로 강하고 세찬 색깔 때문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나 수직으로 세워진 나무까지 그의 선(線)은 곡선이라는 것이 나를 더 흥분시켰다. 부드럽게 굽거나 구부러진 선(線)은 그가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형태의 메시지다. 사물의 상징성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의 순환을 피터는 그림 전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