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소녀 수돗물을 마시다
서울 살이-1971년~
지금은 수도권이라 근거리지만, 우리 시골에서 서울 가려면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 했다.
서울로 이사 가는 날 그랬다.
부모님으로부터 서울로 이사 갈 거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벼슬이나 얻은 것 마냥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녔다.
서울 사람들은 좋은 양옥집에 꼭지만 돌리면 나온다는 수돗물을 먹기 때문에 얼굴이 하얗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도 서울 살면 얼굴이 하얘질 거라는 생각에 잠이 오질 않았다.
나물 캐던 뒷산, 개 헤엄치던 앞 개울 그리고 다방구, 고무줄, 숨바꼭질, 공기놀이하던 집 앞 산소벌퉁이에 미련 둘리 없었다.
서울로 이사 가는 날,
아버지는 이삿짐을 실은 세발 달린 용달차를 타고 가셨고, 어머니는 갓 돌 지난 막내를 업고,
5학년 오빠와 3학년 나는 일곱 살 동생 손을 꼭 잡고 물골안 동구 밖에서 버스를 탔다.
아침부터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까지 온종일 걸려 우리가 살 서울 집에 도착했다.(우리 가족이 정착한 곳은 요즈음 HOT하다는 ‘뚝섬’이었다.)
멀미를 한 탓에 거반 주검이 된 나는 어떻게 생긴 집인지도 모르고 동생들과 그냥 지쳐 잠이 들었다.
한기가 들었다. 이상했다.
“아버지는 왜 군불을 때지 않으신 거지?”
오들 오들 떨고 있는 나를 아버지는 꼭 안고 다시 재우려 했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첫 잠은 자고 깨기를 반복했다.
아침이 밝자마자, 나는 다시 시골로 가자고 아버지에게 울며불며 생떼를 놓기 시작했다.
그 집은 마당도, 마루도, 윗방도, 내가 좋아하는 처마 밑 봉당도 없었다.
양옥집은커녕 서울 가면 먹을 수 있다던 수돗물도 없었다.
그 집은 그냥 루핑으로 얼기설기 엮어 지은 서울 변두리 판자촌의 ‘하꼬방(판자집의 비표준어)’이었다.
얼마 동안이었는지 모르나 나는 시골집에서 자는 꿈을 꾸며 울다 잠이 들었다.
자꾸 시간이 갔다. 그러다가 시골집이 자꾸 흐려져 갔다.
그렇게 하꼬방은 ‘우리 집’이 되어 갔다.
우리 집 문 앞 오른편으로 띄엄띄엄 있던 시골집과는 달리,
바짝 붙은 판잣집들이 골목을 이루고 나란히 늘어서 있었고
주변으로 난생처음 보는 양배추밭이 널리 펼쳐져 있었다.
뒤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쓰레기 하치장이 있었다.
동네 아이들과 나는 종종 쓰레기 하치장에서 이것저것 신기한 물건을 주워왔다.
너른 양배추밭 끝에는 십자가 종탑이 높은 교회당이 서 있었다.
가을걷이하는 밭으로 늘어진 십자가 종탑의 긴 그림자가 유난히 따뜻했다.
교회당 마당은 이내 나의 앞마당이 되었다.
판잣집 동네 사람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막노동판의 일꾼, 채소 농사꾼, 엿장수, 방범대원, 가발공장 노동자, 재건대의 넝마주이 등등...
그중에 아버지는 막노동을 직업으로 택했다.
70년대의 서울은 건설 붐이 있었으므로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자리였다.
변두리 하꼬방은 뚝하면 철거반원이 와서 부셔버렸다.
철거반원들은 예고도 없이 몰려왔다.
멀리 개천 쪽 도로에서 회색 옷에 빨간 모자를 쓴 철거반원들이
손에 해머를 하나씩 들고 용달차를 타고 온다.
동네 사람이 철거반원 떴다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집집마다 세간살이를 밖으로 끄집어내느라 난리법석을 피운다.
하꼬방 철거는 식은 죽 먹기였다.
세워진 나무 기둥 하나만 후려치면 손쉽게 무너졌으므로 일도 아니었다.
나는 막냇동생을 들쳐 업고 우리 집을 부수지 말라고 악을 쓰며 울어댔다.
그러기를 잠시, 다닥다닥 붙어 있던 하꼬방들은 거센 장맛 비에 쓰러진 벼처럼 비닥을 깔고 누우버렸다.
그 일을 처음 겪었을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사람들은 짓기도 쉬운 하꼬방을 그 자리에 다시 지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광주대단지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면 집을 저렴하게 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광주 대단지란 지금의 성남시로,
서울시의 빈민가 정비와 철거민 이주 사업의 일환으로 1968년부터 계획된 위성 도시였다.
아버지도 소문을 듣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기왕에 아들 교육을 작정하고 서울로 이사를 왔으니
서울 변두리 꽁지라도 잡고 살려고 눌러앉기로 했다.
정부가 더 이상의 판자촌을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우리
가족은 시멘트로 지은 셋방으로 이사를 했다.
재료만 시멘트일 뿐 하꼬방하고 별달라 보이지 않은 집이었다.
직사각형으로 길게 지은 2층짜리 시장 건물이었는데,
바깥쪽과 안쪽으로 수십 개의 가게 칸이 있었다.
무슨 사연인지 시장으로 쓰지 못하고 1층 가게 칸을 셋집으로, 2층은 공장으로 임대를 했다.
그 사정을 나중에 어른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 시장 건물 서편으로 10분 거리에, 동편으로 20분 거리에 시장이 있었다.
사람들은 시장 가게 칸에 판자로 방과 부엌을 분리하여 사용했다.
많은 셋집들이 모여 살았다.
그곳에는 딱 한 곳에 수돗가가 있었다.
드디어 피부가 하얘진다는 수돗물을 마시게 되었다.
사람들은 수돗물을 받으려고 각자 물통이나 양동이를 가져와 길게 줄을 세웠다.
수도꼭지 하나에서 나오는 물은 새 오줌처럼 나왔다.
아침에 가져다 놓은 물통이 점심때가 되어도 차례가 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새치기하는 사람 때문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쌈박질하는 사람도 많았다.
어린것들은 2층 난간에서 싸움 구경을 했다.
나와 우리 가족은 긴장감 속에서
수돗물을 마시며 살아가야 하는 서울살이에 서서히 익숙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