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과의 모임이 줄어들면서 부쩍 일본어로 말할 기회가 줄어들었다. 회사도 한인기업이어서 평소 커뮤니케이션은 한국어 위주였다. 한국에서보다 더 선명히 들려오는 한국어의 존재. 일본에서 모국어 실력이 늘어나는 놀라운 경험의 연속이다.
드라마 일본어와 전화 일본어 덕분에 말하기 울렁증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후쿠오카에 있는 바이어와 한국 업체 사이에서 소통 창구 역할을 맡게 되면서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김상, 이번 안전조끼 형광띠 모양을 삼각형으로 해줬으면 좋겠어요. 밝기는 이전보다 15% 더 높이고…”
이메일로 주고받는 비즈니스 연락은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간혹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찾아보면 됐다. 내용에 대해서 곱씹어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있다. 그런데 전화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행위들이다. 바이어에게 전화가 올 때면 언제나 등이 땀으로 흠뻑 젖는 기분이었다.
“아.. 그러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あ、、はい、承知致しました。)”
네, 알겠습니다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 말고는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업계 용어에 대한 이해 부족도 문제지만 머릿속부터 입으로 이어지는 일본어 회로가 일직선이 아니었다. 한국어에서 일본어로, 다시 비즈니스 일본어로. 모든 회로가 가동되길 기다려서는 대화가 될 리 없다. 그래서 네(はい하이)만 내뱉게 된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강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인풋은 많았지만 아웃풋이 적으니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무작정 해외에 나간다고 입이 트이는 건 아니라고 하나 보다. 결론은 평소에도 일본어를 자주 쓰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이곳은 일본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회사를 옮기면 된다. 한인 기업에서 일본 기업으로. 답은 이직이다. 그 길로 이직 준비에 들어갔다.
한국에 사람인이나 잡코리아가 있듯 일본에도 여러 구직/구인 사이트가 있다. 그중 이직(일본에서는 전직이라는 표현이 일반적) 전문인 듀다(doda), 엔텐쇼쿠(en転職), 마이나비텐쇼쿠(mynavi転職)가 유명하다. 이들 사이트에 이력서를 등록했다. 방법은 한국에서 하던 것과 유사했다. 사진을 등록하고, 학력, 사회경력 자격증 등을 넣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식이다.
한편 이직을 위한 자격증도 준비했다. 일본에서 대부분. 직종의 경우 일본어 시험 성적은 큰 의미가 없다. 일본인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데 일본어 고득점이 있다 한들 별다른 의미가 없다. (영어라면 모를까.) 그래서 이직 희망분야였던 이커머스 관련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두었다. 그때 알게 된 것이 통판엑스퍼트 2급. 온라인 등 통신판매와 관련된 기본 소양을 측정하는 시험이다.
이커머스 기업으로 이직 희망했기에 적어도 기본적인 소양을 갖고 있음을 어필하고 싶었다. 100문항을 60분 안에 독파해야 하는 컴퓨터(cbt) 시험이다. 1문 제당 1점으로 합격은 70점 이상. 물론 모든 것은 일본어로 진행된다.
시험까지 3달이 남은 상황. 200페이지 분량의 교재로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볼륨감에 조금 겁을 먹기는 했지만 대체로 평이한 내용이어서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JLPT N2 합격할 수준이라면 충분히 독파 가능한 수준이다. 모르는 단어는 사전으로 찾아보며 내용을 익혀 나갔다.
어느덧 시험일이 밝았다. 신주쿠에 있는 CBT 시험장을 찾았다. 나와 같은 교재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개인신상을 확인한 뒤 지정된 자리로 착석했다. 키보드로 수험번호를 입력하고 개시 버튼을 눌렀다. 시작과 동시에 60분이 카운트되기 시작했다. 교재에서 굵은 글씨로 나왔던 내용들이 정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 안에 100문제를 풀려면 1문 제당 36초 안으로 풀어야 한다. 최대한 빨리 풀고 넘어가되 헷갈리는 문제는 최대 30초 이상을 넘기지 않는다. 남은 시간에 다시 풀면 된다. 이런 루틴은 이미 JPT나 TOEIC 등 시험을 보며 익숙해졌기에 무리 없었다. 다만 종이가 아닌 모니터화면으로 보면서 풀어야 하는 방식이어서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할 수 없어 조금 불편했다. 점점 줄어드는 시간을 보니 점점 손이 땀으로 젖어갔다.
시험 볼 때면 시간이 평소보다 1/2로 줄어드는 기분이다. 문제를 다시 점검해 볼 여유 없이 시험이 종료되었다. 다행히 100문제를 풀었다. 이번 시험은 CBT시험답게 시험종료와 동시에 점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시험 볼 때보다 더욱 요동되는 심장을 움켜잡고 ‘결과확인’을 눌러보았다.
‘김형민, 통판엑스퍼트 2급, 시험 결과 76점으로 합격(合格)’
모니터 화면에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다행이다. 목표하던 이직에 한 발짝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일본어로 자격증을 딸 수 있을 정도의 일본어 실력이 있음도 증명된 순간이었다. 내친김에 다음 자격증에도 도전했다.
화장품 관련 이커머스 회사에 관심을 가졌고 ‘화장품 성분 검정 2급’에 도전했다. 피부 과학, 피부 트러블, 메이크업 등에 대한 기본 지식과 화장품 성분에 대한 이해를 다루는 시험이다. 운이 좋게 이마저도 당당히 합격. 이제 면접에만 합격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