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적이었지만 충동적이지 않았던 첫 사표의 이유
국민요정 정경미 포레버!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듬뿍 담겼을 이 대사는 나에게는 가장 잔인한 대사였다. 매주 일요일 밤 시청하던 개그콘서트는 이 대사가 끝남과 동시에 엔딩곡이 울려 퍼졌고 다시 지옥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심박수가 빨라짐을 느꼈다.
회사는 다른 곳들보다 30분 일찍 근무를 시작했다. 신입이었던 나는 당연히 그보다 더 일찍, 그러니까 8시 전까지는 회사에 출근했다. 도착해서는 업무 메뉴얼과 함께 밤새 메일함에 쌓여있던 이메일을 읽었고 제조공장에 의뢰한 원단의 생산 스케줄 확인을 진행했다.
그리고 8시 30분 되기 10분전쯤이면 어김 없이 나의 사수였던 김 과장님도 출근을 했다. 그리고 그는 창가쪽에 위치한 본인의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나를 불렀다.
"김형민씨"
아... 시작되었다. 업무 OJT라고 할 것도 특별히 없었고 거의 바로 실전이었다. 십수년을 이 일을 해왔던 그와는 달리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그러니까 백지상태인 나는 아무리 메모를 하고 수십번 그의 발을 복기해봐도 이해가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러는 중에 하나, 둘 미스가 발생했다.
"아니 대체 뭘 한거야? 모르면 물어봐야 될꺼 아니야? 아이 XX 진짜..."
짧은 스포츠머리에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나를 향하는 거친 말투. 군대에 악마가 있듯 그 또한 해외영업부서내의 악마 역할을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질문을 해도 이런 것도 질문하냐는 그의 핀잔이 쏟아졌고 그게 두려워 그 옆에 있던 평사원 선배에게 대신 질문을 하기 수차례. 그러나 그 또한 바쁜 업무로 인해 스트레스가 고조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 형민씨는 왜 모든걸 다 물어봐요?"
팀내 직속 선배는 영어권 국가를 담당하고 있었다. 거래처들은 당연히 지구 반대편쪽에 있는 곳이었고 그 곳의 시간에 맞추어 일 하다 보니 매일 막차를 타고 퇴근하기 일쑤였던 그가, 나에게 짜증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였다.
일은 처리 해야하는데 방법을 잘 모르겠고, 물어보자니 눈치 보이고.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시간은 퇴근 시간인 오후 5시 30분을 훌쩍 넘겼고 금새 밤 9시, 10시가 되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로 회사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고시방으로 돌아왔다. 간신히 다리를 피고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좁고 막힌 공간이 그나마 유일한 안식처였다.
방금 눈을 붙인 것 같은데 금새 날이 밝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샌가 회사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김 과장님이 출근했다.
"김형민씨!"
2013년 5월이 밝았다. 시간이 약일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하루 하루는 잔인하리만큼 똑같았다. 자신감이라는 것은 존재할리 만무했고 오늘 하루 제발 무사히 보낼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형민아. 나 일 그만두고 일본에 워킹 홀리데이 가기로 했어"
여느날처럼 점심시간, 회사 근처 벤치에서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을 때 대학교 선배로 부터 메세지 한통을 받았다. 워킹홀리데이라. 선배도 나도 둘 다 일본 유학 경험은 커녕 짧은 여행경험이 전부였다. 나보다 먼저 취업해서 서울에서 잘 자리를 잡고 있다고 생각 했던 선배의 갑작스런 연락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더 늦기 전에 일본 가는게 좋을 것 같아. 다음달에 바로 일본에 가기로 했어"
학교 선배와의 짧은 통화를 끝마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달라질 것 같지 않은 이곳에서의 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렇게 살다가는 최소 우울증에 걸릴 것이 뻔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직속 선배에게 상담을 요청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 저 회사 그만두고 일본에 가겠습니다."
나의 갑작스런 말에 적지 않게 당황해 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말을 했을지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도 똑같은 과정을 겪었으니까.
"너무 충동적으로 생각하는거 아니야? 몇일만 더 생각해보고 그때도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과장님께 보고 드릴게"
그날 저녁부터 나는 일본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기 시작했다. 워킹홀리데이, 해외인턴, 신문장학생 등등... 그러다가 해외인턴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 왔고 모집요강을 확인 후 이 방법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당시는 정부에서 해외 취업을 장려 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일 뒤 나는 다시 직속 선배에게 일본에 가겠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으며 해외인턴제도를 통해서 가을경에 일본으로 가겠다고 구체적 계획까지 전달 했다. 선배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김 과장님에게 보고를 드렸다.
그렇게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한국에서의 지독했던 첫 사회생활이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