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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Jan 06. 2022

캄보디아에서 숏컷 디자이너를 찾아라

숏컷을 한 사람들에게는 다들 제 나름의 스타일 스탠다드가 있다구요!

당연한 말이지만 머리가 자꾸 자란다. 정말 쉴 새 없이 자라고 있다. 단백질이라고는 두부밖에 먹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관련 이야기), 무럭무럭 잘도 자란다. 이 말은, 내 걱정 또한 하루하루 길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만 자랐으면 좋겠다. 출장 생활 중인 프놈펜은, 머리 자를 자를 곳도 마땅치 않은데.


숏컷 인간은 해피하다.


나는 20대 초중반을 허리까지 치렁이는 긴 머리를 데리고 살았다. 씻겨주고, 말려주고, 빗어주고, 다려주고, 때때로 묶어주고. 하루에 두 시간을 머리 치장에 썼던 것 같으니 모시고 살았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다가 26살, 나는 취업을 했고, 취업과 동시에 내 시간은 급속하게 수축되었다. 게다가 이 시간이라는 게 날이 갈수록 쪼그라들었다. 시간을 물 쓰듯 써도 여유롭던 대학생 시절의 생활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나에게, 긴 머리는 오래지 않아 짜증과 피로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나는 아주 열렬한 분노에 휩싸여 머리를 자르기로 결심했다. 고작 머리 하나 감고 말린다고 30분이나 더 일찍 일어나고 있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로 나는 머리를 잘랐다. 많이.


내 머리는 그 뒤로도 야금야금 줄어들고 있다. 이제는 명백하게, 짧은 머리를 하고 있다. 숏컷.

(좌) 철이 없었죠. 저 머리를 모시고 출장이며 관광이며 다녔다는 게. (우) 숏컷은 자유다.

숏컷의 장점은 백 날, 천 날이고 말할 수 있다. 끝도 없다. 매일 아침, 모든 첫 만남, 대화의 매 순간, 매번의 미팅, 나의 온갖 생활 속에서 숏컷은 옳다. 숏컷은 내 생활을 편안하고, 즐겁고, 아름답게 한다.


그러나 가끔 난감해진다.


그러한 효녀 숏컷도 내 골치를 아프게 하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출장 생활이 길어질 때다.


나는 못해도 2개월에 한 번은 머리를 잘라야 한다. 때문에 보통 출장 전에는 머리를 자른다. 더 깔끔한 모습으로 클라이언트를 만나는 게 좋은 첫인상을 남기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내 나름의 기준 시간이 경과한 머리는 약간의 스트레스와 자신감 하락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스트레스와 자신감 하락은 복리다. 머리는 계속 자라나고, 자랄수록 끔찍한 모양새로 악화된다. 그래서 이번 출장에도 직전에 머리를 한 번 잘랐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출국이 미뤄지면서 출장 5주 차를 맞은 지금은 머리가 꽤나 꼴 사나워졌다.


물론, 꼴 사납다는 건 나만의 기준이다. 숏컷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마도) 본인만의 스탠다드가 있다. 그것도 매우 날카롭고 예민한 스탠다드가.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숏컷 인간은 자신이 가는 단골 미용실이 있을 것이며, 그 미용실에서도 한 분의 선생님께만 머리를 맡기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용기 가득하고 호기심 충만한 숏컷 인간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미용실이나 새로운 선생님에게 자신의 머리를 맡기는 모험에는 "NO"를 외칠 것이다. 왜냐면, 헤어컷이란 1회성의 모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헤어컷은 약 2달간 지속되는 매일매일의 자기 확인 체험이다. 우리는 아침 기상 직후에 한 번, 옷을 골라 입을 때 두 번, 출근길 차창을 통해서 세 번, 양치하면서 네 번, 그리고 우리의 방광이 찰 때나 코로나가 걱정돼 손을 씻을 때마다 매번 거울을 통해 우리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잘못된 커트는 우리를 하루 백 번도 좌절시킬 수 있다. 머리를 망친 채로 1개월을 살아야 한다? 상상만으로도 너무너무 무섭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반대도 성립한다. 잘된 커트는 우리를 하루 백 번 기쁘게 한다.


프놈펜에서 숏컷 디자이너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이러한 연유로 나는 걱정 반, 설렘 반이라는 신묘한 감정에 휩싸여서 프놈펜의 미용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미 출장 팀원들에게 검증된 한인 미용실이 한 곳 있었지만, 그곳만은 피하고 싶었다. 우리 아저씨들과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머리는 절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아저씨들 죄송합니다. 외모 폄하가 아닌 점, 양지해주시기를.) 그런 미묘한 곳에서까지 일심동체 팀워크를 발휘하고 싶지는 않다. 몰개성은 용납 못 해. 팀 내 외모 다양성에 보탬되고 싶다는 소망으로 작게 포장해본다.


그리하여 손가락이 닳도록 구글맵을 당기고 줄이며 헤어살롱마다 눌러보고 평을 읽어보았다. 음. 어렵다. 내가 찾는 그런 깔끔하고도 독특하면서 클래식하고 묘하게 세련된, 그런 느낌. 나를 싹 휘감는 그 느낌이 잘 없네. 탐색 방향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벙깽꽁을 돌아다니면서 본 일본인 미용실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한국인 헤어스타일은 일본인과 가장 비슷하니까, 일본인 미용실을 가서 잘라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다. 그 정도 일탈이야 괜찮을 것 같았다. 일본 특유의 스타일링이 나에게는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만 모험심을 발휘해보기로 했다. 구글에서 'Japanese haircut phnom penh' 따위로 이리저리 검색해보자, 후보를 두 곳으로 추릴 수 있었다.


선생님,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둘 중 어디로 가야 하죠?

  

두 미용실 모두 위치나 가격이 비슷했다. 일본인 디자이너에게 커트하면 30불, 캄보디아 디자이너는 15불을 받았다. 그리고 두 곳 모두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결과물 사진을 공유하고 있어서 가서 직접 잘라보지 않아도 그 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 차이를 알아볼 줄 아는 눈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내게는 보는 눈이 딱히 없다는 것이었다. 내게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기준선은 어딘가에 확실하게 그을 수  있지만, 커트의 구조나 선 따위를 볼 줄은 몰랐다. 어렴풋이 머리는 구획과 덩어리가 있으며, 선과 흐름, 움직임과 연결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내 단골 미용실의 사장님은 직업적으로 매우 프로페셔널 한 디자이너였으며, 관련 지식 공유에 아주 적극적인 사람이어서 주워들은 건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사장님의 서당개 4년 차인 셈이라 풍월을 읊을 줄은 알았다. 다만 주관이나 판단력이 없었다.


"사장님.. 짧고.. 실례되는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나는 어렵게 한 마디를 꺼냈다. 사장님은 흔쾌히도 두 곳의 인스타그램을 살펴봐 주시고, 어디를 가는 것이 더 좋을지, 그리고 디자이너에게 어떤 사항을 요구하면 좋을지까지 조언해주셨다. 만세.


Hana를 만나러 가다.


선생님이 골라준 미용실은 Grow Tokyo라는 곳으로, 숙소에서 세 블록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심지어 내가 자주 가던 빵집 Eric Kayser과 같은 건물 2층이었다. 평일에는 근무 시간과 맞지 않아 예약을 하지 못하고 일요일 오후로 예약을 잡아두고는, 일요일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Grow Tokyo

가격:
 - 여성 커트: 일본인 디자이너 $30, 캄보디아 디자이너 $15)
 - 남성 커트: 일본인 디자이너 $26, 캄보디아 디자이너 $12)
전화: +855 78 42 4528
주소: No219E1, street63 corner322, Sangkat Boeung Keng Kang 1 Khan Chamkamorn , Phnom Penh city, Phnom Phen City

    

오늘 특히 거지 같았던 내 머리.

일요일,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나 운동을 좀 하고 샤워를 했다. 짐에서, 내 화장실에서 거울을 흘끗 보며 이쯤에서 인내를 버리고 미용실 예약을 잡기를 백 번 천 번 잘했다고 생각했다. 한 주라도 더 참았다면, 나는 쾌활함을 많이 잃었을 것이다. 구겨진 셔츠를 다리지 않은 채 입고 다니는 그 기분을 아시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도 혼자만의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은 자꾸만 졸아드는 것이다. 작고 쭈글쭈글하게 지글지글. 머리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며 갸웃한다. '가만. 머리가, 조금 별로인데?' 하면서. 그러다가 점차 머리가 덥수룩하다고 느껴지는 날이 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가끔씩 '음. 오늘은 머리가 정신을 좀 차렸는데?' 싶은 날들이 있어, 미용실 방문은 슬금슬금 미루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햇볕 맑은 날,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는 경악하게 된다. 곧바로 허겁지겁 미용실 예약을 잡는다. 그것이 내 레파토리. Grow Tokyo를 가기로 한 날은, 거울을 보면서 안도했다. 아, 정말 기막힌 타이밍이야. 오늘이 아니었다면 정말 슬플 뻔했지 뭐야.


(좌) 2층에 작게 보이는 헤어메이크업숍 (우) 천국으로 향하는 길인가 싶었고.

발걸음 가볍게 미용실로 갔다. 내가 예약한 디자이너의 이름은 Hana. 미용실은 빵집 건물 2층에 소심한 간판을 걸어두고 있었다. 빵집을 빙 둘러 건물 입구를 찾았다. 아, 드디어. 미용실로 걸어 올라가는 길. 계단 하나 오르기가 이렇게 두근거릴 일이던가. 평소와 조금 다른 내가 되어 이 계단을 다시 내려오는 상상을 하니 심장이 열광했다.


미용실은 내 생각보다 밝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나는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블랙 앤 화이트 톤 실내에 차분하고 약간은 음울한 분위기를 상상했었다. 실제의 미용실은 우드톤에 길게 난 창문에서 가득 햇살이 들어와 따뜻한 느낌이었다. 리셉션 직원에게 예약 사항을 말하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소파에 앉아 어떤 사람들이 머리를 하고 있나 미용실을 휘 둘러보았다. 의외로 남자 커트 손님이 많았고, 펌 시술 중인 손님도 한 명이 있었다. 


스태프 룸에서 하나가 나왔다. 미용실 웹페이지에서 직원 프로필을 살펴보았던지라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 #$@#$....?"


하나는 일본 말로 나를 반기다가 점차 목소리가 낮아지더니 이내 말을 멈추었다. 당황스러워하는 내 기색을 알아본 듯했다. 하나는 꾸벅, 인사하더니 리셉션에 가서 예약정보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Hello, you come for hair cut?"


실용적이고 친근한 영어로 물어왔다. 그렇게 나는 하나의 손님이 되었다. 


Hana의 커트.

원하는 머리가 있냐고요?

샴푸는 한 캄보디아 직원이 해주었는데, 어찌나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는지, 오히려 내가 더 긴장이 되어 몸이 경직되었다. 샴푸 후 자리를 옮겨 거울 앞에 앉았다. 의자가 높이 조절이 되지 않는 나무다리의 소파 의자여서, 의아하게 여겼다. 여기선 높이 조절이 되는 의자를 구할 수 없나?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높이 조절이 되는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한국에서는 보통 손님이 앉는 의자의 높이를 조절해가며 머리를 자르는데, 여기는 그 반대였다. 손님 편의를 생각하면 미용사의 의자가 움직이는 게 맞는 것 같긴 했다. 손님 앉은 의자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것도 실례라고 생각해서 미용사가 그런 의자에 앉아 커트를 하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못했다.


하나는 내게 원하는 스타일이나 보고 온 사진이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그런 게 없는데. 나는 내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이런 머리도 했었고, 이런 머리도 했었고... 나는 선이 깨끗하고 클래식한 커트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며, 직업 때문에 너무 캐주얼한 스타일은 곤란하다고 설명했다. 스타일북을 가지고 들춰보던 하나는 이내 책을 덮고, 거울을 가져와 내 뒷모습을 보여줬다. 


"Here a bit heavy now. Lighter."


나는 무조건 예스- 예스- 여요.  


하나가 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석- 석- 째깍, 째깍. 그런 기분 좋은 소리들이 났다. 날카로운 두 날과 가녀린 머리카락들이 어떻게 이렇게 단단하고 단정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걸까. 하나의 커트는 조심스럽고 야금야금해서 오래도록 잔 가위질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머리를 말린 후 다시 머리를 잘라주었다. 젖은 머리와 마른 머리 소리의 차이. 석- 석- 소리가 삭- 삭- 으로 가벼워진 게 느껴졌다. 참 듣기 좋은 소리란 말이지.


Hana가 만든 나.


30분 만에 상쾌한 머리가 되었다. 머리를 자르는 내내 작고 여린 가위질을 보면서 '너무 조금 자르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결과물을 보니 머리는 한 층 가볍고 깨끗해져 있었다. 흡족.


(좌) 마당을 나온 암탉 (우) 광대부터 달라진 모습


낯선 것은 마음을 떨게 만든다. 겪어보지 않은 영역으로 발을 들이는 경험은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그 경계의 선을 폴짝 넘는 순간, 순식간에 찾아드는 안도와 평온, 흐뭇한 미소. 이 날의 커트는 그런 미소를 준 경험이었다.  


2022년은 선을 넘는 순간이 많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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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가는 미용실. 상수 위치. 1인 예약제. 이 미용실에 대한 글은 따로 하나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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