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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호 Oct 19. 2019

수바스

걸음이 느린 아이





어릴 적 나는 또래의 많은 형제들처럼 형의 옷을 물려 입으며 자랐습니다. 순해 보이면서도 고집은 바득바득 부리는 구석이 있다며 종종 어머니의 혀를 내두르게도 했다지만, 새 옷이나 장난감을 욕심내지는 않았죠. 언젠가 가족들과 시내에 나갔을 때, 형에게 새 옷을 사 입히다 미안함을 내비치는 어머니의 시선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지만 더욱 아무렇지 않아야 했으므로, "엄마, 형 저 옷 다 입으면 나 주세요~!" 신이 난 듯 말하며 어머니의 미안함을 달래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설픈 건 한결같으므로, 그 말이 어머니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을 거란 생각이 이제야 드네요.


수바스는 몇 번을 물려 입은 듯 해진 교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잠기지 않는 가방의 지퍼는 그저 내용물을 흘리지 않도록 가운데에서 지탱하는 단추 같은 역할을 할 뿐이었죠. 교복 바지도 마찬가지여서 학교에 갈 때면 흘러내린 지퍼를 가운데쯤으로 올려주곤 했습니다. 신발의 찍찍이도 무용지물이어서 달랑달랑 신발을 옮기며 걸었습니다. 신발을 옮기는 걸음이라니. 그러나 수바스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형들의 손을 꼭 쥐고 부지런히도 걸었습니다.









학교 선생님 사이에서도 귀여움을 듬뿍 받던 수바스. 그의 교복을 안쓰럽게 여기시던 담임선생님께서 교복을 사 입으라며 돈을 쥐여 주었지만, 그 돈은 가족들의 끼니를 해결하는 데 쓰였습니다.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던 선생님은 여전한 교복에 불평을 쏟고 혀를 내둘렀다지만, 그럴 수밖에 없던 부모의 마음은 또 얼마나 쓰렸을까요?


수바스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그의 손을 이끌어 시장의 교복점(?)을 찾아갔습니다. 단돈 만 원이면 새 바지와 셔츠와 구두를 마련할 수 있었죠. 필요한 이가 있을까 가져갔던 작은 배낭은 수바스의 가방이 되었습니다.


며칠 뒤, 새 옷을 입힌 수바스가 온종일 친구들에게 새 옷을 자랑했다는 이야기를 듣곤 괜히 먹먹해지기도 했습니다. 교복이나 가방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늘 무언가에 골똘한 표정이었지만, 새 옷과 새 가방이 좋지 않았을 리 없죠.









가난은 숨길 수 없다지만, 애써 숨길 필요도 없습니다. 좋은 것을 숨길 필요는 더욱 없겠죠.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니 좋다고 말해야지. 그래, 가진 것을 부끄러워 말고 좋은 것은 실컷 자랑도 하고 말이죠.


작은 옷장을 뒤져 한껏 멋을 부려 보았으나 거리에 나선 내가 어쩐지 초라해 보인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마주 선 내 모습은 더욱 초라했죠. 이미 기가 죽은 나는 어느 때보다 어설펐고 나의 좋음도 꺼낼 수 없었습니다. 그건 정말, 꿋꿋하던 수바스의 걸음처럼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이 당연한 사실을 천사처럼 투명하던 그에게 배웠습니다.













내 눈에 비친 수바스가 이토록 투명하니, 내 눈이 조금 맑아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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