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의 어느 아침이었던 것 같다. 여느날 처럼 요가 수업에 가는 길이었다. 골목에서 한 남자가 나를 보고 말을 걸어왔다. 약간 으슥한 곳이었고 아침이라 지나가는 다른 사람은 없었다.
'제가요. 용역 일을 하는데요. 요새 일이 없어서 일을 며칠 못 나갔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건장한 사십대 초반의 남자. 그는 연신 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근데 아침에 일어나봤더니 애가 냉장고에 있던 곰팡이가 핀 김치를 먹고 있는 거예요. 배가 고프다면서. 그래서 식당에 가서 좀 얻으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말하기가 너무.. 그래서 그냥 오는 길인데. 그래서요...'
나는 그 말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아. 김치요?'
나는 멍청하게도 며칠 전에 엄마가 잔뜩 해다준 김장김치를 떠올렸다.
'아. 그게 아니라 몇 천원이라도 있으시면.'
'아.'
돈을 달라는 얘기였다.
요가 수업이 있는 문화센터는 걸어서 십 분 거리. 나는 보통 지갑을 가져가지 않고, 핸드폰도 놓고 다닌다. 그날도 파카에 전날 쓰고 남은 몇 백원만이 짤랑거렸다.
'제가 지금 돈이 하나도 없어요.'
남자는 나를 잠깐 쳐다보더니 아쉽다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갔다.
멀리 걸어가는 남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응. 그래. 아빠 가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가.'
아이가 전화를 한 것일까.
그 순간 나는 집에 잔뜩 사다놓은 바나나와 단감과 귤 한 박스. 그리고 쌀. 오븐에 구워놓은 고구마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집으로 뛰어가서 그걸 갖다 줄까. 하지만 그러면 요가 수업에 늦는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집에도 현금은 없을텐데. 먹을 걸로 주면 받을까?
내가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는 동안 남자는 어느새 저 멀리로 사라졌다. 나는 하릴없이 센터를 향해 걸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이 아려왔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던 길을 돌아가 남자가 사라진 골목에서 서성거렸지만 당연하게도 남자는 없었다.
몇 천원이 없어서 아이를 밥을 못 먹일 만큼 힘든..... 그 남자는 이 동네의 어디에 사는 것일까. 아이가 곰팡이가 핀 김치를 먹고 있었다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요가 선생님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말하는 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요가 선생님이 살풋 웃었다. 나도 엉거주춤한 미소를 지었다. 요가를 하는 내내 복잡다단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곰팡이가 핀 김치를 먹고 있는 아이의 생각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그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남편은 만약에 자기가 애 아빠라면 지나가는 여자에게 돈을 구걸하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분명히 사기꾼일 것이라고 장담했다. 나는 애를 팔아서 몇 천원을 얻으려고 사기를 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며칠 전 어느 일요일날. 나는 집 근처 미용실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누군가 또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 남자였다. 그 때보다 입성이 좋지 않았고, 마른 듯한 얼굴에 흰 머리가 듬성 듬성 나 있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듯 했다.
'제가 일곱살 짜리 아이를 키우는데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보니 걔가 냉장고에 있는 김치를 먹고 있는 거예요.'
또 냉장고의 김치. 왜 그 놈의 냉장고에는 김치 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선글라스로 가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번에도 저한테 그 얘기 하셨어요.'
'아, 그렇죠? 제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데.'
그가 반갑다는 듯이 나에게 몇 발자국 다가왔다.
'근데 제가 돈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자 그는 저번처럼 걸음을 멈춰섰다.
그리고 나는 그를 뒤로 하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코너를 지나친 후에 그가 나를 쫓아오지 않는지 돌아보았다.
아이가 육개월이 지나서 또 냉장고의 김치를 먹을 확률은 어떻게 될까? 냉장고의 김치 얘기는 이를테면 레파토리 같은 것이었다. 얼마나 많이 말을 했는지, 그의 말은 밤새 연기 연습을 한 배우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나는 집으로 걸어오며 생각했다. 도박 중독? 알콜 중독? 나같은 사람에게 몇 천원을 얻어서 무엇에 쓰려고 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에게서 술을 마신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나 다행인 것은, 그가 말을 지어낸 것이다. 그에게는 냉장고의 김치를 먹고 있는 일곱살짜리 아이는 없을 것이다. 정말 그런 아이가 있었다면 나는 정말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