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회사 이야기
두 번의 개성 강한 회사 덕분에 난 뷰티 산업에 질렸다고 느꼈다.
당시에는 회사의 성격이나 구조가 나와 결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에 뷰티 산업 자체가 나랑 맞지 않으며, 질린다고 생각했다.
타이밍이 좋게 마케터는 앞으로 숫자를 능수능란하게 다뤄야 한다는 선배의 조언이 있었다.
이참에 APP 서비스를 기반으로 한 플랫폼 산업을 경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2년 차 플랫폼에 브랜드 마케터로 입사하게 되었다.
이제 막 규모를 키워가던 회사의 마케팅팀은 실장, 팀장, 팀원 총 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직장인으로서 처음으로 두 가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20억 예산의 IMC 캠페인을 운영해 본 마케터
권고사직을 받으며 무력감과 허무함을 느낀 직장인
그리고 회사에 다니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면접을 보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면접관으로 마케팅 실장/팀장님 그리고 인사팀장님이 들어왔다.
무거운 분위기의 면접에 점차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렇게 약 40분의 면접이 끝나고 인사팀장님만이 남아 추가 질문을 했다.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의 연봉 수준과 같은 당연한 질문들로 시작했다.
뜬금없이 MBTI를 묻는 것은 요즘 간혹 그런 곳이 있다고 하니 '트렌디하네?'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회사가 엄청나게 큰 규모로 투자를 받았다며 앞으로 복지가 크게 개선될 것이라 자랑했다.
톰 브라운 셋업을 입고 있던 그의 말에 나는 내심 속으로 생각했다.
'저렇게 비싼 옷을 입을 사람이 기획하는 거면 정말 돈 되는 복지가 생기는 건가?'
3일 후 나는 인사팀장님으로부터 최종 합격 연락을 받았다.
메일로 오퍼 레터를 요청했으나, 우리 회사는 그런 것 없고 그냥 출근하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복지는 커녕 인사 체계도 없어 보였다.
공유 오피스에 위치한 회사는 조금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팀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모두가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배정받은 자리에 가니 새 노트북과 모니터가 상자째로 쌓여 있었다.
날 그 자리로 안내한 인사 팀원분은 알아서 잘 셋팅해서 사용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뒤에서 실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얼핏 들을 수 있었다.
'드디어 00 씨가 출근했네!'
면접 때 처음 본 상사가 날 이렇게 기다리고 반가워하다니?
이후에 알고 보니 날 이렇게 반가워하시는 것에는 복잡한 이유가 있었다.
팀은 단합이 안 된 콩가루 집안 같은 상태였고 그 분위기를 풀어낼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다.
회사와 팀 안에서 사람 간 관계가 변화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적어보겠다.
아무튼 나의 출근으로 마케팅팀은 네 명의 구성원을 갖추게 되었다.
엄청난 브랜딩 경력을 갖고 있지만 플랫폼 산업은 낯선 실장님
회사의 시작을 함께해 브랜드에 대한 애착이 있는 츤데레 같은 팀장님
첫 회사에 대한 열정이 있었지만 찍어 누르는 소통에 지친 마이웨이 MZ 팀원
그리고 소비재에서 플랫폼 회사로 이직에 성공했다는 기쁨에 찬 나
이곳에 입사하자마자 마케터로써 해보기 어려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시리즈B 투자를 앞두고 브랜드 주요 지표를 폭발적으로 성장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이에 실장님은 IMC 캠페인의 필요성을 윗분들에게 보고했고 약 20억의 예산을 배정받았다.
캠페인 기획에 앞서 고객 인터뷰를 통해 현재 상황을 파악했다.
타 경쟁사와 큰 인지 격차로 인해 플랫폼 서비스가 필요할 때 우리 서비스를 떠올리지 않음
서비스 구매 상황에 특정 플랫폼만 이용하기보다 최대 3개 업체 가격 비교를 함
이를 토대로 우리의 캠페인 목표를 설정했다.
브랜드 노출량을 늘려 최초 상기율을 개선하고 신규 회원/트래픽 등 주요 지표를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내놓으라 하는 종합광고대행사와 함께 경쟁 PT가 진행됐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장면에 내가 제법 규모 있는 회사로 이직했다고 내심 생각했다.
그렇게 최종 대행사가 선정되고 당시 드라마에 출연 중이던 배우가 메인 모델로 선정됐다.
세 편의 영상 광고 출고까지 약 2개월, 캠페인 라이브 준비는 빠르게 진행됐다.
캠페인 라이브 후 플랫폼은 100만 유저를 돌파하며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달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시리즈B 투자는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점점 회사에 돈이 없어 지출결의를 올려도 처리가 미뤄진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누군가는 이 상황에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쓰냐는 비난 섞인 얘기를 했다.
결국 회사는 투자 유치에 실패했다.
아직 흑자전환을 하지 못 한 회사는 순식간에 분위기가 안 좋아졌다.
그러던 과정에서 실장님이 먼저 회사를 떠나게 되셨다.
팀원들을 모아두고 담담히 퇴사를 말씀하시던 실장님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우리는 목표한 바를 이뤄 나가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조직개편 발표가 났고 마케팅팀은 어중이떠중이 부서로 분류되었다.
회사는 더 이상 마케팅 비용을 쓰지 않았다. 당분간 돈 들어가는 기획안은 올리지 말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 나는 내심 '나도 언젠가는 권고사직을 받겠구나' 짐작했다.
당장 돈이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단순한 쿠폰/할인 프로모션 기획안만 찍어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반복되며 약 3개월간 나는 회사에 출근해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주변에서는 오히려 좋지 않냐며 회사에서 놀 수 있다니 부럽다고 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나는 허무했다. 월급날이 돌아오는 것이 무서웠다.
내가 돈값 못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소식에 밝은 팀원이 곧 조직개편이 있을 거라며 소식을 전해줬다.
당시 회사는 '비용 절감'이라는 목표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었으니 이는 곧 구조조정이었다.
마지막이 정말 다가오고 있었다.
'회사가 이사 갈 예정이다.
미안하지만 거기에 너의 자리는 없다.'
자기 마음대로 회사를 휘두르던 본부장님이 갑자기 나를 불러 한 이야기다.
더 이상 회사에 내 자리가 없다고 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은 당황스러웠다.
나는 직장을 잃었다.
퇴근하고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아빠한테 전화했다.
소식을 전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빠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을 수 있는 일'이라며 위로했다.
그 말에 나도 그럴 수 있다며 나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권고사직 합의서를 회사에 제출했다.
이런 상황에도 본부장님의 눈치를 보며 짐을 싸도 되는지, 출근을 안 해도 되는지 눈치 보는 내가 무력했다.
회사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다.
같이 성장해 나가는 생산적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회사는 나를 버리고 떠나버렸다.
그리고 조직에 소속되는 것으로 안정감을 찾던 일순간에 나는 불안정해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방법도 모르겠다.
회사만이 유일한 내 자아실현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지난날들이 무상해졌다.
회사에서 버려진 나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23년 10월 약 4년간의 직장 생활 1부가 끝났다.
Question) 회사와의 준비되지 않은 헤어짐을 생각해 본 적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