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이 없어진다는 것에 대하여

by 숙제강박

취향이란 것이 참 오묘하다.

나의 행동이나 생각의 어디까지를 취향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애매할 뿐더러, 취향이라는 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것들의 집합 인지도 잘 모르겠다.


누구나 자신의 취향이 개성 있으면서도 고상하기를 바랄 것이다. 취향이라는 것이 단순히 그 사람의 성격적 특징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더 그렇다. 개성 있으면서도 고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은 삶의 많은 선택지에서 개성 있고 고상한 쪽의 선택을 하며 살아온 것이고,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배경과 그 배경을 통한 여유로운 마음가짐이 전제되었을 것이다. 반면, 비루한 취향을 가진 사람은 그런 선택을 하며 살 수밖에 없었을 현실적인 장벽이 있었을 테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취향은 그 사람의 거의 모든 환경과 그 환경을 대하는 자세를 반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취향은 무섭다. 취향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도 내 취향에 대해 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내 배경과 성격을 판단해버린다. 물론 몇 번의 거짓으로 취향을 꾸며댈 수는 있다. 찬구 따라서 한 번 가 본 캠핑의 기억을 끄집어내서 취미인 양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유튜브에서 본 미식가들이 가는 맛집을 내 단골 가게인 것처럼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취향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취향이라는 것은 한두 번의 거짓으로 꾸며지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하는 모든 행동과 말 하나하나가 서로 섞여 그 사람이 느끼는 내 취향을 만든다. 그것은 실제 내가 느끼는 내 취향과는 또 다르다. 또한 그 사람의 내 취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가늠하기도 힘들다. 그런 이유로 취향을 꾸며내기는 쉽지 않다.


내가 느끼는 내 취향은 색이 뚜렷하진 않아도 색이란 것이 있다. 어려서는 더 색이 옅고 밝았던 것 같지만 지금은 갈색이나 쥐색에 가까운 느낌이다. 물론 색상표를 보면 쥐색도 하나가 아니듯 내 취향도 딱 어느 쥐색이라고 단정해서 말하기는 힘들다. 나는 나의 디테일한 취향을 너무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느낀다고 남들이 나를 갈색이나 쥐색으로 평가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남들에게 내 취향을 묻지도 않을뿐더러 묻는다고 해도 솔직하게 “넌 꼭 쥐색 같아.”라고 말해 줄 사람은 없으니까. 나보다 단편적으로 나를 아는 이들이 나를 더 밝게 기억하고 있을지, 더 어둡게 기억하고 있을지 언제나 살짝 궁금하다.


남에게 내 취향이 어떻게 느껴질지에 대해 너무 의식하다 보면 결국 취향은 자연스러운 색을 잃기 마련이다. 색을 밝게 꾸며준다는 온갖 광고의 노예가 될 수도 있고, 내가 원래 무슨 색인지 떠오르지 않을 만큼 다른 색이 많이 섞여버릴 수도 있다. 나의 색에 확신이 없었던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까지의 날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남들에게 내 취향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은 그 어느 때보다 강했던 날들. 남들이 좋다는 취향을 꾸며대면서 마치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양 행동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보통 이성을 유혹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다가 맞이한 30대에서 나는 나의 취향의 색을 찾아야 하는 벌을 받고 있다.


오히려 대학시절 취향이 없는 것 같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은 유난히 조용하고 내성적이어서 친해질 기회가 없었고, 기억 속에서 별 색깔 없이 묻혀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친구들은 당시의 나보다 더 자기 색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드러내기 위해 다른 색을 섞지 않았다. 그 친구들도 30대가 되었을 테고 나보다는 취향의 색을 찾는 게 힘들진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게 무슨 색이 든 간에.


그러고 보면 취향이 남들에 비해 없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추구하는 취향과 현실의 괴리가 만들어낸 작품이 아닐까 한다. 이상이 큰만큼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다른 이에게서 취향을 찾아 덕지덕지 붙여놓은 모양새다.


오늘도 나는 뭘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 아메리카노와 크로와상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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