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숙제강박 Oct 23. 2020

초가을의 파주에 대하여

2020년 10월 23일

평일 낮의 파주다. 아내가 일찍 퇴근하는 수요일은 아니지만 요즘은 금요일에도 종종 파주를 찾는다. 아내가 금요일 저녁의 교통 체증을 피할 수 있도록 일찍 퇴근을 해 함께 집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럼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퇴근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덕분에 여섯 시면 치킨 한 마리를 시켜놓고 금요일 저녁의 들뜬상태를 온전히 즐길 수 있다.

평소 파주를 사랑하는 내 마음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고 있지만 가을의 파주는 그 마음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더욱 아름답다. 가을의 햇살은 봄, 여름의 그것과는 달라서 공기 중에 부스러지는듯한 느낌을 낸다. 뉴스에서 미세먼지가 많다고 떠드는 날에도 햇살이 퍼지는 느낌을 받긴 하지만 그것과 달리 가을의 햇살은 더 자연스럽고 청명하게 퍼진다. 또 낮이 짧아진 덕분에 볕이 좋은 창가에 몇 시간만 앉아있으면 시간에 따른 햇살의 변화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또렷했던 햇살이 점점 부드러워지고 모든 사물의 그림자가 변화하며 사물들의 깊이감이 생긴다.  

여름의 모습과 다름없는 초록의 나무들부터 이미 완연한 노랑과 빨강의 모습을 띤 나무들까지 한데 어우러진 모습도 장관이다. 버드나무나 소나무가 여전하다면 갈대숲은 가을의 느낌을 조금 살려주고 느티나무나 단풍나무는 가을의 느낌을 물씬 더해준다. 특히 초가을에는 심학산 정상의 알록달록한 빛깔과 산 아래로 갈수록 초록빛을 띠는 색의 변화가 압권이다. 산 아래쪽의 빵집에 간다는 핑계로 차를 몰아 산을 둘러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런 날 파주에서 책을 읽으면 본래 독서량의 두 배는 가뿐히 채울 수 있다. 책을 읽다 눈이 뻐근해지면 잠시 눈을 돌려 산과 갈대밭을 잠시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잠시 밖으로 나가 사람이 없는 틈에 마스크를 벗고 신선하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도 도움이 된다. 쉬는 숨을 몸이 온전히 흡수하지 못할까 걱정이 될 정도로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이맘때쯤이면 근처 논을 태우는 그을음 냄새가 공기 중에 섞여있다. 시골 생활을 해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냄새다.

그런데 이렇게 행복한 날 하필 들고 온 책이 쇼펜하우어에 대한 내용이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며 생각일 뿐이고, 인간 실존의 본래 형태는 동요와 불안이라는 이야기들. 평소 같았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허무주의에 동참했을 테지만, 오늘은 영 공감이 되질 않는다. 독일에는 파주 같은 곳이 없나?, 싶기도 하다. 언제나 무드에 맞는 책을 고를 수 있도록 가방에 두세 권은 넣어 다녀야겠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아이에게 떳떳한 충고를 할 수 있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